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4월에 읽어보는 시와 흰동백

김창집 2021. 4. 5. 10:58

아름다운 일생 김수열

 

그는 지금 오등동 산11-1번지에 잠들어 있다

건입동에 묻혔었는데 누군가 내리친 둔기에

비석이 두 동강 났다

 

대를 이을 손 없었고

생을 마감하기 전, 그는

대한극장 검표원이었다

 

그 전에 그는 생계를 위해

무근성에서 손바닥만한 쌀배급소를 운영한다

 

그 전에 그는 성산포 경찰서장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 당시

관할구역 221명에 대한 총살명령을

부당하므로 불이행으로 맞서 목숨을 살린다

 

그 전에 해방을 맞아 제주에 온 그는

모슬포경찰서 초대서장이었다

4.3 무렵 관할구역 좌익총책으로부터 100명의 명단을 확보

적극적으로 자수를 권유, 목숨을 살린다

 

그 전에 그는 독립군이었다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에 가입

중앙호위대장을 맡아 무장투쟁의 선봉에 선다

 

1897년에 나서 1966년에 생을 마감한 그 이름은

문형순이다

 

                                -시집 호모 마스크스(아시아, 2020)

 

북촌리에서 - 김경훈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애원성 보다 빠른 속도로 이미

발사된 총탄은 어김없이 산 목숨에 꽃혀

죽음의 길을 재촉한다

 

시체산피바다

 

수백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이의 내일은

또 다른 죽음

울음도 나오지 않는

 

원한이 사무쳐 구천에 가득할 때

 

젖먹이 하나 어미 피젖 빨며

자지러지게 울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제주4.3순례시집까마귀가 전하는 말(도서출판 각, 2017.)

 

만벵디 - 강덕환

 

그대, 기억하는가 섯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모진 광풍에 스러지던 칠석날 새벽

 

부모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뼈마디 하나 겨우 추스른 주름진 세월

 

몇 번이나 새로 돋았을까 저 풀들

시퍼렇게 날 세우고, 진초록 물결로

그 새벽 이슬길 몇 번이나 밟아왔을까

 

옷은 얻어서 옷이고

밥은 빌어서 밥인데

얻지도 빌지도 못한 혼백

견우별, 직녀별로 피어올라

인연의 질긴 끈 놓지 못하는 사이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햇볕에게 보태어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

 

가진 것 비록 없어도

더불어 나누는 넉넉함으로

평화의 불씨 당겨 점화하오니

애원의 향으로 타오르십서.

상생의 촛농으로 흘러 내립서.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풍경, 2010)

 

통점 - 이종형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삶창, 2017)

 

나는 아직도 역적인가 - 김성주

    -- 4. 3과 연좌제

 

창밖 담벼락에

인동초 꽃피웠다

 

역적은 숨어사는 요령도 서툴러

을지문덕 꿈을 꾸며 육사를 지망했다

깨어보니 가슴팍엔 붉은 수인번호

스스로 툭, 지는 동백이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섣달 밤

어미 등에 엎인 아이

쫓기는 노루처럼 눈이 큰 노루처럼

총소리에 놀래어 산으로 올랐다

어미젖 산 속에서 잃어버리고

허기진 입 속엔 빨간 멩게* 열매

명백한 대역죄로 수인 찍힌 세 살 아이

 

그 아기의 아이 자라

새처럼 날겠다며

항공대 항공운항과에서 날갯짓을 배우는데

양 날개 묶어놓은 연좌 사슬에

항공대 정문 밖으로 새는 떨어져

 

봄이 오고 언 강물이 풀린 지 언제냐고

인동꽃은 나더러 나오라는데

나는 왜, 이리도 손발 저린가

 

---

*멩게 : 청미래덩굴의 제주어

 

                       -시집 구멍(도서출판 심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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