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이어지는 추사길
“하늘이여! 대저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天乎此何人斯). 3코스 출발점에 세워놓은 안내판에 나오는 표제어이다.
그리고 ‘위리안치(圍籬安置)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자유스럽게 유배지 인근을 돌아다니며 풍경을 감상하고, 또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건강을 관리하던 추사의 자취를 통해 그의 방황과 사색을 엿볼 수 있는 길이다.’란 해설을 덧붙였다.
필자가 쓰는 ‘길 이야기’는 보다시피 주변 풍광과 그 길에 얽힌 역사나 인물 등을 추적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전문성을 갖고 너무 파고들면 분량 때문에 기사로 적합지 않고, 또 사색(思索)은 길 가는 자의 전유물이기에 될 수 있으면 생략하려는 것이다.
3코스는 대정향교에서 출발하여 추사와 전각(篆刻), 추사와 건강, 추사와 사랑, 추사와 아호를 생각하며 안덕계곡에 이르는 길로 10.1km 약 4시간 코스이다. 어차피 추사의 발자취와 상관없이 조성된 곳이기에 주제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사색하며 걷는 길이다.
□ 추사 김정희 ‘그는 누구인가’
이번 답사는 벗들과 함께 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안내 겸 길라잡이를 하지 않으면 안 돼서 간단히 추사의 일생을 정리해 본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 용궁리에서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37)과 어머니 기계유씨(杞溪兪氏, 1766~1801)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노영(魯永)의 양자가 된다. 경주김씨 집안으로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수렴청정을 했던 정순왕후가 12촌 대고모였는데, 순조연간 세도정치 시절 안동김씨, 풍양조씨, 풍산홍씨 등과 힘겨루기를 했던 집안이었다. 이로 인해 출세에는 밑바탕이 된 반면, 뒤에 가화(家禍)를 입어 유배생활을 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 신동 소리를 듣던 추사는 북학파로 알려진 박제가(朴齊家)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게 되면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과 학예를 동경하게 된다. 24세 때인 1809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마침 호조참판이었던 아버지 노경이 동지사 부사로 연경(燕京)에 가는데, 자제군관 자격으로 따라 가게 된다.
연경에서 보낸 두 달은 추사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중에 당시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학예인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과 운대(芸臺) 완원(阮元)과의 교류는 추사의 활동 영역을 세계로 넓히는 한편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연경에서 돌아온 그는 경학과 더불어 고증학과 금석학으로 범위를 넓힌다. 그리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 정진하게 되었고, 1819년 4월 34세의 나이로 대과에 합격,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 예조참의 등을 지내게 된다.
□ 추사의 제주 대정 위리안치
예나 지금이나 일부 추악한 정치 세력들은 상대를 물어뜯고 얽어매어 무너뜨린 다음 자신들이 득세하려고 별별 흉계를 다 꾸민다. 50대의 추사가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중에도 윤상도 옥사사건으로 친아버지 노경이 고금도에 유배 되었다가 해배된 후 세상을 떠났고, 추사도 꿈에 그리던 동지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되살아난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가지도 못하고 국문을 받던 중, 조인영의 상소로 겨우 목숨을 건져 제주 대정으로 위리안치 된 것이다.
조선시대 행형제도 중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주거를 제한하는 연금 형태로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만 지내게 했다. 이 형을 받는 사람은 대부분 당쟁으로 인한 정치범이다 보니, 보기 싫은 놈을 사지(死地)로 몰아 꼼짝 못하게 격리시키는 것이다. 추사는 1840년 9월 4일 위리안치 명을 받고 의금부 금오랑이 형행관으로 동행하는 가운데, 전주와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화북진으로 들어와 10월 2일에 대정현에 도착해 미리 준비해둔 송계순의 집에 들었다.
□ 추사와 전각(篆刻)
3코스 출발점에서 남쪽 200m 세거리길 돌담에 ‘추사와 전각’이란 안내판과 함께 밭과 길 사이 경계로 박아놓은 커다란 돌에 추사의 인장들을 새겨놓았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이곳 바위에 새겨놓은 전각은 선연하다. 그 중에는 그냥 ‘秋史(추사)’나 ‘金正喜印(김정희인)’이라 새긴 것도 있지만, 구렛나룻 ‘髥(염)’ 한 글자만 새긴 것도 있다.
알려지기로 추사는 제주에 유배 올 때 청나라 유식(劉栻)의 인보인 ‘일석산방인록(一石山房印錄)’을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평상시 전각에 관심을 기울이던 추사는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란 제자와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많은 전각을 새기게 하는 한편, 제자 박혜백(朴蕙百), 김구오(金九五) 등에게도 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많은 인장을 모으게 된다.
지금 제주교육박물관에서는 제주에 유배 와서 교육에 영향을 끼친 분의 유물들을 모아 기획전을 열고 있다. 그 중에는 추사의 인장 180여 종을 모아 엮은 ‘완당인보(阮堂印譜)’도 있다. 유배 중 제자 박혜백(朴蕙百)이 엮었다는 ‘완당인보’는 전각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데, 1월 31일까지 전시 예정이나 지금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라 안타깝기 짝이 없다.
□ 한라산과 산방산을 바라보며
유배길은 전각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눈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산방산과 멀리 하얀 눈을 머리에 인 한라산이 퍽이나 대조적이다. 원근감 때문에 ‘한라산신이 홧김에 산봉우리를 뽑아 던진 게 날아와 산방산이 되었다.’는 전설은 사실성이 문제가 되겠다.
밭은 추수를 끝낸 곳이 대부분이고, 간혹 다 자란 브로콜리나 꽃이 핀 배추밭도 보인다. 길섶에서 오랜만에 보는 개똥참외로 인해 일행은 한참동안 추억담에 몰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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