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추사 유배길 3코스 – 사색의 길(2)

김창집 2022. 10. 15. 00:28

 

산방산으로 가는 길

 

 

  올해는 추사 유배길을 튼 지 만 10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지금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분이 안 계셔서인지, 갈림길에 세운 표지판이 소실된 곳이 있고, 주제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빛바랜 곳도 있다. 따라서 길 걷기 전에는 시작점에 있는 안내도를 잘 살피고, 휴대폰으로 찍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항시 자신이 있는 지점이나 방향, 특히 오름 같은 지형지물을 살피며 걷지 않으면 쉬 길을 잃는다.

 

  산방산이라 하면 보통 산방굴이 있는 남쪽 큰길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번 길은 반대편 옛날 농로를 이용해 서쪽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도는 길이다. 한 때 올레길 10코스 일부 대체 길로 이용한 바 있고, 요즘은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 트레일 일부 구간과도 겹쳐지는데, 이곳을 추사 유배길로 사용하고 있다.

 

*산방산 일부

 

추사와 건강

 

  산방산길 들머리는 사계로(1121)를 따라 바다 쪽으로 가다가 전기차 충전소를 지나 왼쪽 첫 농로다. 입구에 표지판이 남아 있고, ‘추사와 건강이라 검색하면 지도에도 나온다. 농로 왼쪽으로 꺾이는 곳, 송악과 보리밥나무로 덮인 돌무더기를 의지하여 빛바랜 안내판이 서 있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귀양살이 하는 동안 추사는 몸이 계속 편치 않았고, 풍토병으로 많은 고통을 받은 걸로 나와 있다. 그래서 독우(毒雨)독열(毒熱)독풍(毒風)이 심해 병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집에서처럼 잘 먹지도 못하고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장기(瘴氣) 때문에 고생한다는 것이다.

 

*추사와 초의선사(추사적거지)

 

  지금에 와서 추정해 보면 우선 물이 안 맞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중산간인 대정골에는 좋은 물이 귀했다. 적거지에 보면 초의선사를 맞아 담소하는 장면을 연출한 곳이 있다. 중국에 가보면 물이 안 좋은 지역 사람들이 차를 끓여 갖고 다니면서 마시듯이, 추사도 초의선사가 보내주는 차를 끓여 마시면서 건강을 유지한 것 같다.

 

  언제 해배될지 모르는 상황의 추사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강한 정신력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그 꼬장꼬장한 성격에 의사 오창렬에게, 대정현감에게, 또는 장인식 목사에게 아쉬운 소리로 도움을 청했던 걸 보면.

 

*속칭 벼룻돌

 

베릿돌 아진밧(벼룻돌 앉은 밭)

 

  ‘추사와 건강에서 북쪽으로 200m쯤 되는 길옆에 묵직한 바위가 하나 박혀 있다. 산방산의 바위가 떨어지면서 굴러온 것이다. 북서풍의 영향인진 모르지만 이쪽 북서쪽으로 유난히 많은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조면암질의 이 바위들은 옛날부터 단단하기로 소문이 나서 비석용으로 많이 쓰였다. 길을 가다 보면 이렇게 떨어져 부서진 돌로 쌓은 돌담이 많이 보인다.

 

  길쭉하고 위쪽에 홈이 있어 물이 고여 있는 돌은 벼루를 닮아, 주변 사람들이 베릿돌이라 하여 이 밭을 베릿돌 아진밧으로 불러왔다. 이곳이 지질트레일 구간이어서 한쪽에 안내판을 세웠는데, 올라가 보니 물통에 벌써 개구리가 알을 한 무더기 슬어놓았다.

 

  유홍준이 쓴 추사 김정희에 보면, ‘추사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고, 철저한 장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추사가 글씨를 쓸 때 얼마나 피눈물 나는 장인적 수련과 연찬을 보였는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추사는 훗날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면서,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칠십 평생에 나는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七十年磨穿十硏禿盡千毫).’라 했다. 그런 피나는 수련 속에 추사체가 탄생했던 것이다.

 

*추사길 안내 표지판

 

추사와 사랑

 

  추사유배길 3코스는 산방산 북쪽 등산로였던 보덕사 앞을 지난다. 2012년에 천연기념물인 국가문화재의 보존과 훼손방지를 위해 입산 통제되어 벌써 10년째를 맞고 있다. 마감일이 금년 말이니, 빨리 해제되어 정상에 다시 오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다시 동쪽으로 이어진 길을 걸어가면서 산방산을 바라보니, 평소 보던 모습이 아니고 기암이 줄줄이 박혔다.

 

  길은 곶자왈 같은 곳으로 이어지다 동쪽 산방로 126번길로 나온다. 그곳에 계단을 쌓고 벤치를 몇 개 놓아 추사와 사랑이란 안내판을 세웠다. 내용에 추사가 평생 동안 사랑한 사람은 부인 예안이씨였다. 제주에서 보낸 한글편지 곳곳에 애정이 넘쳐나는데, 그런 부인이 추사가 유배된 두 번째 해인 헌종 8(1842) 11월에 세상을 뜬다. 이 사실을 다음 해 정월에야 뒤늦게 알게 된 추사는 눈물로 제문을 짓는데, 백년해로의 미련이 담긴 최고의 문장이라고 했다.

 

  ‘어허! 어허! 뭇 사람이 다 죽어갈망정 유독 부인만은 죽어서는 안 될 처지가 아니겠소. () 예전에 내가 희롱조로 부인이 먼저 죽는 것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게 도리어 낫지 않겠소?” 했더니, 부인은 크게 놀라 곧장 귀를 가리고 멀리 달아나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지금 끝내 부인이 먼저 가고 말았으니 먼저 죽어 가는 것이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뻔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와 같이, 긴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다함이 없을 따름이외다.’

 

  사실 이 절해고도까지 유배된 선비들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처음엔 좌절과 절망의 나락에 빠지기 쉬웠을 터. 그리고 차차 여건이 허락된다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과 여인을 가까이 하게 되고, 어쩌면 여인은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아는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의 결정판 같은 사연도 존재한다. 하지만 추사는 자신의 건강과 부인의 죽음을 생각하며, 이루고자 하는 일에다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세웠던 건 아닐까?    <계속>

 

*추사와 제자들(추사적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