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와 아호(雅號)
‘추사와 사랑’에서 산방로 126번길을 따라 약 400m쯤 되는 곳에 ‘추사와 아호’ 안내판과 함께 길과 밭 사이 경계 바위에 20개 정도의 아호를 새겼다. 그 사이 더러는 돌이끼에 묻히거나 음각 속의 하얀 페인트가 벗겨진 것도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추사의 아호는 무려 100여 개나 된다. 그래서 백호당(百號堂)이란 호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것은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이다. 본래 호를 사용하는 이유는 본 이름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어 일반 적으로 많아야 서너 개일 뿐이다. 그러나 추사의 경우는 특별한 인연이나 자신의 심경에 따라 다양한 호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수백 개의 다른 호를 사용함으로써 예술가적 면모를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라고 했다.
그가 처음 썼던 아호는 추사(秋史)였고, 중국에서 완원(阮元)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으로 지은 아호가 완당(阮堂)이었는데, 이후 오랫동안 대표적인 아호로 썼다. 그 외로는 작품의 뜻에 맞게 즉흥적으로 짓기도 했고, 작품을 받는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쓴 것도 있다.
서재 이름을 끌어다 쓰는 경우는 보담재(寶覃齋)나 실사구시재(實事求是齋), 차와의 인연에서 승련(勝蓮)이나 고다노인(苦茶老人), 스스로를 지칭해서 동해서생(東海書生)이나 동이지인(東夷之人), 유배에 풀려 과천에 살 때는 노과(老果) 또는 과칠십(果七十)이라 쓰기도 해서, 추사의 아호는 이제 와서 작품의 편년을 따지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 화순리를 지나며
‘추사와 아호’ 안내판에서 산방로로 나와 화순리를 거쳐 샛길로 들어서 안덕계곡의 ‘추사와 창천’ 안내판을 만나기까지의 거리는 무려 4.8km나 된다. 이 길을 걸으면서는 추사가 제주에서 지냈던 8년 3개월의 기간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아도 좋겠다.
긴 유배 기간 동안 모든 여건이 변변치 않음에도 그런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냈는데, 마지막 9개월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장인식 목사의 등장으로 그나마 행동의 제약을 조금 풀 수 있었을 것이다. 한라산을 다녀온다든지, 제주목 산지천을 찾았다든지, 창천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바로 이 시기가 아닌가 싶다.
추사가 남긴 또 하나의 자취는 김만덕(金萬德)의 양손(養孫) 김종주(金鍾周)에게 써준 편액이다. 김만덕의 선행은 채제공의 ‘만덕전(萬德傳)’ 같은 곳에 자세히 드러나 있어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제주에 온 후에 알았는지 모르지만, 편액은 ‘은광연세(恩光衍世)’로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이 글은 돌에도 새겨 고으니모르 그녀의 무덤에 세웠다가, 모충사 아래쪽 김만덕기념관 옆에 다른 석물(石物)들과 함께 옮겼다. 편액의 글씨는 감정가들에 의해 ‘추사의 제주시절 서풍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가보로 간직하던 것을 후손들이 2010년 김만덕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 안덕계곡
‘추사와 창천’ 안내판 조금 지나 안덕계곡으로 이어지는데, 지금 문화재 돌봄 활동 중이라 계곡 입구를 막고 있어 취재는 전에 다녀온 내용으로 대신한다. 겨울이지만 종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동백나무 같은 상록활엽수들이 울창하고 맑은 개울물이 흐른다. 추사가 부러워할만한 곳이다.
돌오름 북동쪽에서 발원해 굽이굽이 흐르는 창고천은 안덕계곡을 거쳐 화순해변으로 흘러간다. 용암이 흘러와 점차 식으며 굳어져 암반이 깔린 바닥은 물이 스미지 않아 창천에서 솟아나온 석간수는 지표수가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게가 기어 다니고, 작은 고기떼들이 유영했었다.
그러다 보니, 바위가 깎이고 깎여 조면암 절벽을 이루며 3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게 되어, 천연기념물 제182-6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태초에 7일 동안이나 안개가 끼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며 땅이 솟아나고 물이 흘러 치안치덕 하던 곳이라 하여 ‘안덕계곡’이라 이름 했다는 전설이 있다.
□ 서재 임징하 선생 유허비
안덕계곡에서 나와 서재선생 유허비가 있는 감산리 마을회관으로 갔다. 들어가면서 보기에 오른쪽 구석지에 오래된 비석 하나가 서있다. 바위 이끼로 얼룩진 비석 앞면엔 ‘서재임선생 적려유허비(西齋任先生謫廬遺墟碑)’라 새겼다.
서재 임징하(任徵夏, 1687〜1730)는 숙종〜영조 때 문신으로 1713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 1717년 가주서를 거쳐 1721년(경종 1) 지평․사간원 정언 등을 지내다가 신임사화로 삭직 당하였다. 1725년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장령으로 기용되었고, 6개조의 소를 올려 탕평책을 반대,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1726년(영조 2) 평안도 순안현으로 유배되었었는데, 이듬해 7월에 대정현으로 이배되었다.
집안이 제주와 인연이 있는지 그는 숙종 때 제주목사로 왔던 임홍망(任弘望)의 후손이면서 한 때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진구(金鎭龜)의 사위다. 그러다 보니 김진구의 문하생들이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그의 나이 41세인 1727년 8월에 노복 산이를 시켜 감산촌 고제영 집을 적소로 정했고, 도사가 와서 가극(加棘)했다.
그는 이곳에서 ‘감산7가(柑山七歌)’와 ‘제주잡시’ 20수, ‘추흥시(秋興詩)’ 8수 등 많은 한시를 남겼다. 1728년 2월 도사가 내려와 그를 잡아다 역모의 죄명으로 친국을 했으나 끝까지 왕의 각성을 촉구하며 항거했는데, 언관을 벌주면 안 된다는 전통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확립과 국가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여덟 차례의 고문 끝에 1730년(영조 6)에 옥사했다. 정조 때 관직이 복구되어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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