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개혁과 개방, 어디까지 (2)

김창집 2005. 3. 8. 16:12

--- 상해·소주·장가계 답사기(2005. 2. 25.∼3. 1.) 

 


 

* 졸정원의 태호석들
  
▲ 졸정원 그 뒷 이야기

 

 졸정원(拙政園)은 쑤저우의 유원(留園), 북경의 이화원, 승덕의 피서 산장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의 하나로 꼽힌다. 원래는 당나라 시인 육구몽(陸龜蒙)의 사저였던 곳을 명대의 어사(御使)였던 왕헌신(王獻臣)이 별장으로 고치면서 '졸정원'으로 이름하였다. 실직 후 고향에 돌아와 다시는 정치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정성을 들여, 무려 13년이나 걸려 이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원래 쑤저우는 눈이 내리는 날이 별로 없기 때문에 파란 색유리를 이용해 밖에 눈이 내리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의 태호석을 구입하여 여기저기 세워놓았다. 여름이면 연꽃으로 뒤덮이는 연못도 여러 개 있다. 일설에 그는 이곳에서 왕헌신은 36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16년간 살았다 한다. 그리고 이 정원을 잃게 된 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 졸정원의 분재


 왕헌신에게는 말 안 듣는 외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주색잡기에 빠져 날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왕헌신은 쑤저우 중심에 자리한 현묘관(玄妙觀)에 가서 점을 보았는데, 마음에 든 글자를 한 자 지적하게 했다. 왕헌신은 '못날 졸(拙)' 자를 짚었다. 점쟁이는 왕헌신에게 "이 글자로 보면 손(手)을 흔들면 모두 빠져나가게(出)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 주었다.


 사실 점쟁이는 병 때문에 온 줄로 알고 "손을 흔들면 병이 낫게 된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이었다. 왕헌신의 의도는 본래 자기가 지은 졸정원이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손 대대로 자기 집안의 정원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얼마 안 가 왕헌신이 죽자 그나마 간섭하던 아버지까지 없어져서 그 아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매일 도박과 음주를 일삼았다. 결국 그 아들이 마작 도박에 손을 대 하룻밤만에 이 정원을 잃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 한산사에 세워진 보명보탑

 

△ 육조 시대에 세워진 고찰 - 한산사

 

 다음에 우리가 찾은 곳은 서기 502년에 건립된 사찰 한산사(寒山寺, 한산스)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나게 크고 높은 보명보탑이 눈앞에 나타난다. 한산사는 역대 중국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다섯 번이나 불탔다가 청나라 말기에 재건된 고찰이다. 이 절에는 독특한 모습을 한 한산 스님과 습득 스님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절의 연기설화(緣起說話)로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중국에 한산과 습득이라는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 마을에는 아주 예쁜 처녀가 있었는데 형인 한산과 서로 사랑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그의 아버지는 처녀를 동생인 습득과 결혼을 시키려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습득과 처녀가 서로 걱정하는 얘기를 엿들은 한산은 그 길로 집을 떠나 이 절로 들어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동생도 괴로운 나머지 결혼을 포기하고 형을 찾아다니다 이곳에서 만나 스님이 되어 성불하였다.



 

* 한산사에 모셔놓은 한산과 습득 스님상

 

 지금의 건물들은 청나라 마지막 선통(宣統) 3년(1911년)에 중창된 것이 대부분이다. 경내에 들어서니 향 묶음을 통째로 불 붙여 분향하고 있어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법당엔 휘황찬란하게 도금된 불상이 모셔져 있고 장식 또한 요란하다. 나와 보니 오른 쪽으로 종루가 보인다. 이곳의 종은 원래 1,400여 년 전에 만든 것이었는데, 소리가 아주 좋아 청나라 때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고, 지금의 것은 1907년에 제작했다 한다.


 한산사 입구에는 풍교(楓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과거에 실패하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운하에서 배를 타고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달이 져 까마귀 울고 하늘에 서리 가득한데,/ 단풍 든 강 고깃배 불빛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쑤저우 성 밖 한산사에서 울리는/ 한밤의 종소리는 나그네의 배까지 들리누나.' (月落鳥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眼, 始蘇城外寒山寺, 夜半種聲到客船)

 


 

*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나온 감감천

 

▲ 피사의 사탑을 닮은 호구탑

 

 원래 쑤저우 지방은 삼각주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높은 지대가 없고 운하가 많은 지역이다. 그러한 곳인데 약 40m 정도의 인공산에다 정상에 커다란 탑이 세워놓았으니, 어디서나 우러러 보인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해용산(海涌山)이었는데, 운암사 탑인 호구탑이 유명하기 때문에 호구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절로 들어가는 것처럼 대문을 들어서니 나무와 주변경치가 잘 어울려 있어 송나라때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소주에 와서 호구를 구경하지 않다니, 오오! 안타까운지고."(到蘇州而不遊虎邱 乃是憾事)라 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화분에 심어 활짝 피었던 모란이 일주일전 추위로 주춤했으나 그런 대로 볼만하다. 호구산 정상에 춘추시대 오나라의 왕 합려의 묘지가 있었는데 장례를 지낸 3일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호구(虎口)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올라가다 보니, 왼쪽에 조그만 우물이 보인다. 이른 바 감감천(글자가 안떠서 사진 글씨 참조)인데, 이곳에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다.

 


 

* 호구검지 표지석


 사연인 즉 이렇다. 옛날 이곳에 어떤 땡땡이중이 있었다. 그는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우물을 길러 다니기가 귀찮아서 이곳에 우물을 파고 있었다. 그것을 본 윗 스님은 헛일 하지 말라면서 '만약 이곳에 물이 나온다면 나는 두꺼비가 되겠다.'까지 장담했는데, 열심히 파다 보니 하늘이 감동하여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옆에 두꺼비 형상을 한 조그만 돌이 묻혀 있었는데, 이는 그 스님이 두꺼비로 변한 것이라 한다.


 조금 위 오른 쪽 길가에는 둘로 갈라진 바위가 묻혀 있었는데, 이름하여 시검석(試劍石)이라 했다. 이 돌은 합려가 그의 보검(寶劍)을 시험해 보기 위해 잘랐던 흔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이곳 소주는 예로부터 명검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유명했다. 1천명이 앉아 설법을 들었다는 천인석(千人石)을 지나면 합려가 아끼던 보검 3천 자루를 묻어두었다는 말을 믿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진시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파놓은 곳에 물이 고인 검지(劍池)가 있고 명필들이 써놓았다는 글씨가 몇 개 있다.

 


 

* 중국판 피사의 사탑이라는 호구탑


 정상에 오르니 도저히 사진기에 한꺼번에 담을 수 없는 탑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호구탑이다. 이 탑은 송나라 때인 서기 961년에 만든 7층탑으로 그 높이는 자그만치  48m에 이른다. 북서쪽으로 2.5도 정도 기울었는데, 그 때문에 중국판 피사의 사탑으로도 불린다. 맞은편으로 내려왔는데 이끼가 성성한 지붕과 나무가 있어 고색이 창연하다. 

 

△ 쑤저우의 어제와 오늘

 

 차를 타고 상하이와 소주를 오가면서 가이드에게서 이곳에 있었던 오나라와 월나라의 이야기를 실컷 들었다. 월왕 구천(句踐)과 오왕 부차(夫差)가 벌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부터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성어를 일깨워 주었고, 상하이와 쑤저우와 항저우(杭州)를 이으면 삼각의 모양이 된다는데, 항주에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만 남는다. 오죽했으면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고 했겠는가?

 


 

* 검은 색으로 변해가는 수로의 물


 옛날 중국인들은 '소주(蘇州)의 여자를 아내로 삼고, 광주(廣州)의 음식을 먹으며, 항주(杭州)의 서호를 바라보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어서는 목재가 좋은 유주(柳州)에서 만든 관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수저우의 운하는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경항대운하의 수로이다. 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던 옛날에는 수로를 통해 많은 물자를 이동했다. 그래서 바다와 수로를 끼고 있는 이곳 쑤저우는 교통의 요지였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운하와 다리가 조화를 이루는 물의 도시 수저우는 이제 물빛이 점점 검게 변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쓰레기가 떠다니고 기름이 떠 있는 곳도 있다. 가난한 주민들은 화장실을 갖추지 못해 변을 그냥 개천으로 흘러보내든지 아니면 변기통을 이용해 운하로 버리고 있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개발하면서 폐수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흐름이 급하면 자정작용이라도 기대해보겠지만 물이 흐름은 거의 가두어놓은 물 수준이다.   

 


 

* 거리 상점 앞에 세워놓은 비단옷 입은 마네킹들


 어제의 우리가 그랬듯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마구잡이식 개발은 얼마 안가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여러 도시들이 세계 공해의 도시 랭킹에 이름을 여러 개 올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개발 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다 일정한 높이에 도달했을 때 정체되는 이유가 이런 데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 이곳의 자랑인 비단 가게에서 패션 쇼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금 한창 잘 나가고 있지만 환경 문제가 하나의 복병이 되리라고…. (계속)

 

♬ 등려군 -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 명대에 세워진 북사탑(北寺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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