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處暑) 전날 밤에
비답지 않은 비가 내렸습니다.
뜨거워진 건물과 도로를 식히지 못해
어젯밤도 열대야는 여전했습니다.
물봉선은 습한 곳을 좋아하는 꽃이라서
아직도 남아 있는 습지를 찾아
계절을 어기지 않고 피었습니다.
“더위야! 물렀거라.”
오늘이 처서인 줄 알고
제 색을 갖추어 피었습니다.
♧ 처서 소묘(素描) - 박인걸
낮 달 선명한 하늘에
햇살도 기가 꺾이고
느티나무 짙은 그늘에는
엷은 한기가 맴돈다.
귀뚜라미 처량하고
풀벌레 울음 애절한데
곱게 분장한 코스모스는
그리움을 가득물고 있다.
거칠게 부대끼며
생존의 몸부림으로
치열한 계절을 넘어온
野草야초들이 숭고하지만
이미 끝난 게임
점점 기우는 분위기
白露백로가 저만치서 기다린다.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라.
♧ 처서處暑 - 박얼서
발톱 세우던 더위가
담장 밖 동태를 살핀다
입추를 지나온 군상들
바람의 서곡들만을 골라
세월의 길목 부릅떠가며
시간여행 벌판을 달렸어도
아직 때 이른 가을자리
저 너머 백로(白露)
좀 더 가까이
한 달음에 내달려오도록
하늘 길을 닦고 있다.
♧ 처서 무렵 2 - 박종영
대장간 풀무질에 번득이는
불꽃이 아니더라도
가슴 데우는 늦더위에
손바닥 부채로 불러들이는 서늘한 바람
처서 지나고 나면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에도 누그러질 거라 믿었던
초가을 볕은 아직도
까마귀 대가리에서 번들거리고
푸른 논배미 장리 벼는
올올히 배부른 이삭 배고 서서
스적스적 윤기를 더해가고
*만물에 논 구석 돌아치며 뽑아내는
아득한 들소리 밀려오면
덩실덩실 허드렛일꾼 어깨춤이
절로 풍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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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농업) : 그해의 벼농사에서 마지막으로 논의 김을 매는 일
♧ 처서 무렵 - 박덕중
한 여름
불칼 휘두르던 번개
하늘 무너질 듯 쾅 쾅 대던
천둥소리도
멀리 사라지고
가을의 언덕
태아를 위해
고개 숙여 묵상하는 오곡들
어머니 같은 마음
사랑 듬뿍 쏟아
태아의 속살 위해
하늘도 사랑 베풀어
황금빛 햇살
열매 속물이 들 때
만삭이 된 들판
바람도 조심조심 스쳐 가고
어디서 망치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 물봉선(14) - 손정모
한기가 살얼음처럼 깔리는
만추가 되면
개울을 따라 번지는
선홍색의 꽃물결
5학년 동급생이어도
말 한 마디
없었던 아랫동네
소녀
늦가을 한낮에 들러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엄마의 재 뿌리는데
좀 도와 줄래?
나룻배에서 재를 날리고
석양이 지는 강둑에서
눈물 글썽이며 흐느끼고는
마을 떠난 그녀.
꽃잎에 내비친 실핏줄마다
상기된 소녀의 얼굴
자줏빛 저녁놀에 잠겨
불길처럼 일렁인다.
♧ 물봉선 - 권오범
외로움이 터전인 심심산천
태어나자마자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야 하는 팔자기에
늘 허출한 깔때기가 되었다
꼬리마저 살짝 말아 내린 채
오매불망 미지의 사랑만 그리다 보니
홍 자줏빛으로 달아올라
열없이 건넌 성하의 강,
호시절 지나 처참하게 사그라진 꿈
가까스로 추슬러
부르르 떨리는 조막손만 남았는데
고추잠자리야 헤살부리지 마라
장맛비 유달리 지짐거려
외로움이 독이 되어 서린 몸
나를 건드리지 말아다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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