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단풍잎이 빛나던 날에

김창집 2013. 10. 29. 09:06

 

탐라계곡을 지나면서

오랜만에 만나는 빨간 단풍잎을 보며

환성을 질러댔다.

 

그것은 무심한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퍼뜨리기 위함이었지만

더러는 꽤 시끄러운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단풍을 찍을 때만큼은

모처럼 자연 속에서

너무도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 단풍나무 - 김경윤

 

입이 없어도 잎을 흔들어 운다

이제 청춘의 시절은 가고

비바람 치던 하늘도 맑게 개어

강물이 시리게 푸르른 날에

붉은 마음 가슴에 넘치는 슬픔

화사하게 꽃처럼 세상에 내걸어 달고

소리도 없이 찬란하게 운다

모두가 땅을 향해 사는 동안

온몸을 세워 하늘을 받쳐든 너는

입이 없어도 잎을 흔들어 운다

붉은 깃발을 가슴에 매달고

젊은 날의 추억으로 눈시울 붉히는

슬픈 시인처럼.  

 

 

♧ 단풍나무 - 김승동

 

옷을 벗는 것이다

푸르고 단정하던 껍데기를

벗어 던지는 것이다

 

여름 날

숨막히게 내리 쪼이던

햇살 앞에서도 당당했고

 

온 몸에 퍼부어 대던

굵은 물줄기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던 푸르름

 

바위틈에 바람이 일고

흰 눈발 펄펄 하늘로 가는 날에도

담담하게 서있으려니 했는데

 

훌훌 옷을 벗는 것이다 저렇게

벗어 던지면 더 아름다운 것을

기어이 보여주는 것이다  

 

 

♧ 단풍나무 - 김신오

 

회초리로 내려치다가

저들끼리 쑥덕거리다가

손가락질하며 웃다가

마침내

속옷을 벗겨

찢어나누며

스스로

세상 죄를 묻고 있다

 

눈빛 번득이던 찬란한

푸른 혈관을 타고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린다

 

대답 없는 하늘을 우러르면

상처 난 나무

눈물을 흘리며

붉게 물들고  

 

 

♧ 가을 동화 - (宵火)고은영

 

바람의 통로에서 가을을 만났다

흔들리는 갈밭을 맴돌다 자지러진 음표로

중구난방 휩쓸리는 바람은 싸늘하다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떨어진다

단풍나무 잎새도 팔랑팔랑 떨어져 내린다

 

오래전 기억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들은

가을 낙엽 속에 결 따라 부스스 눈을 떴다

은유의 꽃밭을 뒹굴던 시어들은

아직 변방의 외침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저 단풍의 얼굴에 그리움이 있었다

방황의 기로에 나이테만큼이나 농익은  

 

 

♧ 별 만드는 나무들 - 이상국

 

설악산 수렴동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나무가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산에서 자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도 숲이 물결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 단풍 - 김동찬

 

1.

 

그것은 꽃이었다.

 

이파리 하나 하나가 빨갛게 피어나는

꽃잎이 되었다.

 

단풍나무 하나가

하늘까지 닿은

큰 꽃을 피우고 있었다.

 

2.

 

그것은 불꽃이었다.

 

벽에 걸린 유리액자 속에

단풍나무가

초록을 뿜어내고 있더니

어느 저녁

붉게 불타고 있었다.

 

노을 때문인가 하고

눈을 크게 떠보아도

노을은 노을대로

단풍나무는 단풍나무대로

불꽃을 사르고 있었다.

 

불길은 강물 되어

마을을 넘어

산을 넘어

흘러흘러 가고 있었다. 

 

 

 

3.

 

사람들은

붉은 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다,

죽음의 색이라고.

 

그러나

먼저 떠나간 사람들,

남겨 두고 가기엔 너무나 눈이 아린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검정이나 파랑만으로

쓸 수는 없으리라.

 

온 몸으로 피워 낸

붉은 사랑,

마지막

꽃.  

 

 

♧ 바람 부는 날에는 너에게 가고 싶다 - 황청원

 

바람 부는 날에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잔잔히 반짝이는 물결의 비늘을 헤치며

우울한 너의 영혼 껴안으리

수면위에 내려앉은 흐린 물안개에 젖어도 좋으니

피리 소리처럼 흘러서 흘러서 너의 집 문 밖

늦가을빛 단풍나무잎이 지면

거기 함께 흙이 되더라도

너에게 밝히는 그런 흙이 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