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로 남은 말 - 천양희
70년대 긴급조치 시절
항상 똑같은 형량으로 선고하자
어느 인권 변호사는
‘우리나라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니라
법정에서 비롯됐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제는 백화점도
항상 똑같은 질량으로 선고하듯
세일제가 되었다
우리나라 세일제는 백화점이 아니라
법정에서 비롯됐다는
말을 누가 남기겠나
유명을 달리한 변호사의
유명한 말밖에는
돈 있으면 죄도 세일되는
2000년대 긴급한 이 시절에
♧ 책상 - 표광소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악’ 하고 화들짝 책상에서 한 발짝 비켜서
며 책상은 책상 빼닫이 앙다문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상한테 염치없거니와 책상 냄새 몇 술 뜨지 못했다
밤낮 지치고 하양 종이 까망 잉크 아리다 먼지다듬이 쓰린 눈 한
번 깜박이는 새 발톱 낡은
책상을 ‘탁’ 하고 치니 ‘헉’ 하고 배내똥 한 말씀 지끈 싸지르고
참새들이 아리랑 골목길 나섰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날아갔다, 뜬구름은
♧ 신호등 - 박희정
너를 기다리는 동안 신호는 또 바뀌었다
30초 간격으로 깜빡이다 이내 바뀌는
건너편 낯선 사람 속에 내 그리움 찾듯
한때의 붉은 신호등이 푸른 신호등이 되기까지
마네켕처럼 오도카니 서서 신화를 꿈꾼 날들
가을볕 꼬부라진 오후, 너는 오지 않았다
♧ 보산동 - 이태순
보산동 지날 때는 금이가 생각나다
쪽방 껴안고 붉게 핀 금이 닮은 접시꽃
해마다 먼 길 돌아와 피 토하는 누이야
보산동 지날 때는 비가 많이 내린다
담벼락 기댄 금이 맨발이 꽃잎이다
오작교 다다랐는가 접시꽃 내 누이야
♧ 그늘의 오독 - 조동례
감자 캐낸 자리
옮겨 심은 배추 모종이 지쳐 있다
흙을 북돋우고 물을 주어도 소용없이
그늘을 기다린다는 걸 뒤에 알았다
땅속에서 캐낸 감자 하나가
양수를 빠져나온 갓난아이처럼
햇빛 보더니 파랗게 독이 올라
바깥 세상에 눈독 들이고 있다
그늘에 두어야 색이 변치 않은 게 있다
아플 때 다가가면 마음이 편한
그늘 깊은 사람이 있다
오십 평생 자리 잡지 못하고
♧ 수크령 - 조용미
발을 거는, 멈칫멈칫 나타났다 사라지는 보랏빛 꽃들 봄날의 아
련한 분홍이나 파르스름한 흰빛처럼 홀연 사라져버리는 가을의
애잔한 보랏빛들은
사무치고 사무친 때를 지나고 난 후 겨우 움직이게 되는 어떤 마
음의 순서와는 달리 햇빛 아래 보는 수크령은 초록이나 갈색을
지나 검은 자주색
가령 햇빛 아래에서 보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길쭉한 솜털의 꼬
리는 까슬까슬한 부드러움, 수크령 찬연한 보랏빛에 스위치를 누
르듯 탁, 햇빛이 사라지는 시간
역광 아래 어루만지던 검은 보라색은 간데없고 늦은 오후의 한
때 사나운 이리의 꼬리는 스르륵 순순한 풀이 되어버려 꺼끌꺼
끌 수척한 슬픔만 쓰다듬는다
꽃향유 진범 투구꽃 잔대 각시취 용담…… 올해는 보랏빛 꽃들에
게 마음을 조금 내어주려 한다 흑해처럼 검은, 보랏빛 바다는 없다
바다의 보랏빛은
너무 짧은 순간 살며시 사라지기에 그저 뿌옇고 푸른 회색 바다만
저녁의 수크령처럼 어두컴컴 일렁이기에, 스위치를 누르듯 사라지
는 심장의 보라색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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