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별빛극장’이 나왔다.
시집에는 60여 편의 작품을
4부로 나눠 실었다.
평론가 이성혁은 작품 해설에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권력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에게
시적 조명을 비추기도 하고, 자연과의 미메시스를 통해
자연의 타자성을 되살리기도 하면서
동일화와 배제를 통해 작동되는
모더니티에 대한 시적 저항을 보여준다.”고 했다.
시 몇 편을 뽑아
요즘 한창 피고 있는
닭의장풀과 함께 올린다.
♧ 시인의 말
잠시 햇살에 앉아 있는
詩 밖에서도
그 안을 들여다본다
나무 그늘이 내어준 길조차
더 낮고 막막하여도
그곳까지 쓰기 위해 가야겠다.
2015년 유월
한라수목원에서 한승엽
♧ 별빛극장
그들은 모두 은막의 스크린 속에 살고 있다
개봉과 동시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하나 둘 전깃불이 없는 오지로 찾아들어가
죄가 없는 별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들은 간간이 별을 닮으려는 이들에게
발달장애를 앓는 어린별의 슬픈 꿈과
갑자기 퇴출당한 별똥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
도무지 그들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었다
가장 어두운 이야기로부터 궤도를 이탈하려는 순간
은하의 지평에서 밝아오는 새벽
주위는 어두웠지만 외롭게 빛나는 직녀별이
조간신문에 끼어 있는 마트 전단지를 펼쳐놓고
저녁상 차릴 궁리를 하고 있다
언제나 그녀는 낯설어 보이는 길 위에서도
권태를 모른 채 기다림의 서책을 반짝반짝 읽곤 했다
때론 눈먼 아들을 위한 어느 뒷마당의 치성에
소리 소문 없이 등장하는 그들의 조용한 빛
한자리를 지켜온 고향마을 어귀의 외등(外燈) 같았다
그 속살들이 클로즈업되어 장막에 갇힐 무렵
어둠자락을 뚫고 별빛 한 점 내비친다
아, 놓치고 싶지 않은 저 한 편의 뭉클한 명화(名畵).
♧ 해질녘
피켓 하나 들고
1인 시위하던 늙수그레한 사내가
반 평 남짓
크나큰 우주의 천막 속으로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더니
튼실했던 두 다리를
길게
더 길게 뻗으며,
남몰래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는 중이다.
♧ 붉은발말똥게
어젯밤 목구멍으로 토사가 흘러들어오고야 말았습니다
장맛비 그친 구럼비 바다의 수면은 온갖 잡념으로 넘실거리지만
제일로 손꼽는 나의 근친입니다
말똥거리던 눈앞으로 범섬이 노란 띠랑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면서
겨우 한 목숨 이곳에 남겨진 이유를 가늠할 수 있는 까닭이지요
S라인 해안이 콘크리트삼발이에 아찔하게 점령당하고
덤프트럭 굉음에 집게발 부러져도
나는 무수한 깃발 너머, 갯바위 틈의 인동초를 보려 합니다
다시 눈이 뜨거워지는 강정마을 맑은 물 위로
깨진 달빛 송곳니처럼 박혀오면
이제 당신은 습관처럼, 너는 도대체 누구냐고 묻곤 합니다
그러면 촉촉한 기억 하나 베갯머리 적시며 지나갑니다
어디 스쳐가는 게 그 얕은 물살뿐이랴
야행의 틈을 놓치지 않으려 깔아 놓은 통발에 속아
이 비천한 몸뚱어리 높다란 펜스 안에 갇히는 날이면
입천장에 달라붙은 마지막 거품의 온기 아슴푸레하고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고즈넉한 삶의 환영이
간결한 깨우침으로 앞질러 다가오기도 하지요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도 환한 길섶을 더듬어가던 순간
아뿔싸! 세상물정 모르고 늘 순했던 나의 오른팔 은어는
너무 고단하여 비늘만 허옇게 드러낸 채 잠들어 있고
나 홀로 몸 밖의 풍경으로부터 흉흉한 소문을 밀어내듯
가파른 욕망과 알 수 없는 빈혈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붉게 달아오른 등딱지,
얼핏 들으면 들꽃 같은 내 이름이 어렴풋이 보이시나요.
♧ 원담*에 대한 소고 - 한승엽
눈앞에서 가마우지 울음이
눈치 빠르게 그치던 자리
그 환청이 젖은 돌 위에서 들려왔다
검은색 크레파스로 그리고 싶다는 물결의 질문에
주목받는 생애가,
더 이상 세상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생각도
종종 듣기도 했다는데
유일하게 넘나들며 경계가 익숙해진다는 것
차라리 신비로움이 사라져
수평선 밖에서도 수습할 수 없는 일대의 파란(波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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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 : 제주 해안에 돌을 쌓아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만든 돌 그물.
♧ 우물의 눈물학
흙무덤이라고 짐작했었다 빈틈없이 채워졌던 흙을 삽으로 퍼내기 시작하자 웅크리고 있던 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임캡슐을 열 듯 두레박을 타고 내려가 목마른 곳으로 이끌었던 그 순간을 길어 올린다 나도 모르게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혓바닥, 역병이 돌던 시절 몸 안의 핏속에선 한 모금의 생수를 간절히 원했던 것일까 성별 구분이 안 되는 어린아이가 두꺼운 지층을 껴안고 누워 있다 깊은 어둠처럼 깡마른 어깨뼈가 거느리고 있던 흐느낌이 간장을 압도해버린다 살짝 건드리면 산산히 부서질 토기(土器)가 지키고 있는 저 애절한 운명이 동공을 찔러대고
모든 걸 태워버리듯 날마다 꺼내보았을 안락한 생(生)의 자락들, 그리운 것들이 순식간에 깨진다 해도 단 한 번 누군가의 사람의 되었을 것이라는 상상만으로 가슴 벅찼을 지상의 마지막 눈물이여.
♧ 먼 행성의 기도
물고기의 눈으로
는개가 거느리고 있는 창밖을 들여다 보는데
휘어진 가지 같은 고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연둣빛 나뭇잎이 바다를 향해 나풀거리는가 싶더니
이미 어린 소녀의 연분홍 치마가, 화들짝
뛰어내린 후였다
곡선의 꽃으로 피고 싶었을 저 뜨거운 김
우리들의 낭자한 무관심이 머리끝을 뒤덮으면서
먼지 같은 슬픔이 먼 행성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으니
눈을 질끈 감아도
입안에선 제발, 제발……이라는 말이
공전하듯 뱅뱅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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