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8월호가 다음과 같이 나왔다.
우리詩 칼럼 : 창작 ․ 출판 윤리와 노이즈(박승류)
신작詩 18인 選 : 정순영 송문헌 고미경 이인평 권순자 박은우 이재무 김계반 한문수 임채우
향일화 진순희 나영채 채영조 김명자 김사리 김현주 김명옥의 시 각 2편
특별기획 연재시詩 : 치매행 시편(15) 홍해리
기획연재 - 인물시詩 : 인물시詩(8) 이인평
장시長詩 감상 : 개 심리학사전(김석규)
테마가 있는 소시집 : ‘칠성이’외 9편(남대희)과 시작노트
시집 해설, 동화 감상 : 박동남 시집 ‘볼트와 너트’(이애정)
한시한담漢詩閑談 : 수박에 얽힌 한시 이야기(조영임)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 : 몇 개의 ‘얼굴’
그 중 시 몇 편을 골라
더위에도 유난히 빛을 발하는
황근黃槿과 함께 올린다.
♧ 섬류蟾流*야 - 정순영
섬류蟾流야, 씻지 마라.
송림 모래밭에 새긴 꿈을
백발의 나그네가
광평廣坪벌에 드리운 향수
늙은 청송 가지에
큰 날개짓 학鶴되어 앉아
그리는 추억이여.
지리산 청정 바람 자락으로
한다사韓多沙** 휘감는
섬류야, 노래하라.
볼 위에 흐르는 눈물을
---
* 섬진강.
** 경남하동의 신라 때 이름.
♧ 정봉역* - 송문헌
눈이 내리고 있었었지
충북선 간이역 플랫폼 철길에
아재야! 아재야~~~~~!
뒤돌아본 철길역 오솔길에서
손을 들고 달려오는 어린 소녀
본 듯한 얼굴, 아, 아, 아,
‘이거, 언니가 전해 주래요’
내미는 손끝엔 사진이 한 장
교복 입은 단발머리 어여뻐
벽에 걸린 액자에 꽂혔던 그
사진을 뽑아 나 줘라 했던,
안 돼! 하던 흑백 그 사진
조문弔問 길에 만난 아득한
기억, 주름진 얼굴에 선연한
---
* 지금은 폐쇄된 충북선 간이역
♧ 고인돌 - 이인평
차라리 죽음보다 생이 두려워
바위를 덮었나보다
끝내 생은 죽음보다도 무거운 삶이었던가
우린 날마다 생사를 함께 대면하지만
바위보다 무거운
한 생애가 그리도 애처로워
다시는 살아날 길 없는 저승을 덮고 나서
슬픔을 지운다
온몸이 짓눌리는 삶을 오롯이 살면서도
애증이 퍼렇게 돋아날 때는
죽어서는 다시 살고 싶지 않은 설움으로
스스로를 묻는다
묻고 묻는 나날이 한꺼번에 덮여져서
더 이상 깨어나서도 안 되는 최후를 덮어
천 년의 비밀같이 침묵한다
세월이 흐르고 흐를수록
차라리 이별보다 사랑이 두려운 생을 덮고
오랜 기억 같은 바람소리나 듣는다
♧ 고별행진 - 김계반
서로가 서로에게 걸치고 기대어 걸어가는 노부부, 저
어깨에 두르고
허리에 두른 긴 팔
미스코리아가 거리 행진할 때 두른 휘장 같다
잘 익어 수그린 벼이삭, 한 단
다리 넷이 떠받들고 간다
노을 걷히는 저녁이, 허공을 둥글게 밀어올리고 있었다
♧ 미각 - 나영채
사과꽃이 필 때 과수원을 지나갔다
쪽빛이 농염한 날,
다시 그 곳을 찾아 갔을 때는
꽃은 지고 없었다
묵은 사과를 깎는데 바람이 들어 푸석하다
그곳을 지나다가 향기와 빛깔에 홀려
한 자루 사온 사과, 가을이 다가도록 방치했다
뭉그러진 속살의 향기가 소란스럽다
사과의 정수리에 까치 부리가 찍혔다
단물이 고인 사과,
흠집부터 상처가 시작되었다
나보다 새가 먼저 다녀갔다
♧ 낙과落果 - 김사리
당신은 해가 낳은 아이
공중의 매듭을 풀고 날아오르려 했죠
그러나 젖은 날개로는 날 수 없어
그만 공중을 바닥에 내려놓았어요
지상은 기어 다니는 낮은 자들의 것
벌레들 떼 지어 달려들었죠
일몰은 하루 한 차례
식어가는 체온을 재고 갔어요
장대비 퍼붓던 날,
야위어만 가던 당신은
뼈만 남은 자신의 한계와 맞닥뜨렸어요
호두알처럼 단단하고 주름진 뼈를 감추는 나라에서
뼈를 그대로 드러낸 당신,
과감하게 낙落을 선택하였죠
쪼글쪼글 늙어가는 시간은 치욕이 아닙니다
날마다 조금씩 낡아가는 마음으로
매듭을 풀고 높이 날아오를 거예요
해의 나라에서 달의 나라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달이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조금씩 무른 살을 버리고
♧ 모래꽃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148
물새가 발가락으로 모래 위에 꽃을 그립니다
물새는 발이 손이라서 발로 꽃을 피웁니다
하릴없이 파도에 지고 마는 꽃이지마는
모래는 물새를 그려 꽃을 품고 하얗게 웁니다.
물새는 날아올라 지는 꽃을 노래합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간격이 한평생입니다
사람도 사랑도 물결 사이에서 놀다 갑니다
오늘도 모래꽃 한 송이 피워 올리다 갑니다.
♧ 쩜매다 - 남대희
분꽃이
빨간 입술을 뽀루뚱
내밀고 있는 저녁 무렵
공놀이 하다 헐레벌떡 들어온 아들 녀석
발가락이 조금 까졌다고 엄살이다
옛날 생각이 나서
헌 난닝구 쭉 찢어 돌돌 감고 쩜매 주었다
아,
쩜맬 때
울 엄마 옆에서 지켜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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