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9월호의 시와 구절초

김창집 2015. 9. 9. 09:31

 

아침저녁으로 서느런 날씨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덮어 두었던 <우리詩> 9월호를 꺼내

시를 하나씩 읽어보다

몇 편을 골라

향기로운 구절초와 같이 올린다.

 

시의 향기인지

꽃의 향기인지

방안 가득 화기가 돈다.

 

 

♧ 비 내리는 날 - 김영호

 

자전거를 타고 바다 위를 달리고 싶다.

 

기차를 타고 그대 가슴속 바다를 달리고 싶다.

그대 가슴에 터널을 뚫고 싶다.

 

달리다 보면 보일 것이다.

바다가 자전거를 타고 지구를 도는 것을.

기차가 바다를 태우고 우주를 도는 것을.

 

비 내리는 날, 보리라

그대가 나의 등에 업혀 태양을 돌고 있는 것을.

   

 

♧ 샤갈의 정물화 - 이애정

 

모를 일이다

꽃도 아닌 내가 사는 이유

 

햇빛도 누워 있고

나는 잠시 꿈을 꾸었다.

 

저기 저 사과는 뭘까?

   

 

♧ 우체통 - 이종섶

 

그리움을 먹고 사는 빨간 물고기

소식이 마를 때는 아가미를 크게 벌려 호흡하고

사연이 넘치는 날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배설한다

 

외로운 바닷가를 배회하다

육지 이야기를 묻는 파도가 바위에 부딛쳐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을 볼 때마다

꼬리를 내린 채 심해로 도망가곤 했다는 혹등고래의 생태기

뇌가 없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다만 자신을 사육하는 우편배달부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오늘도 정해진 시간마다 삼켜둔 편지를 토해낼 뿐이다

 

심장을 찌르는 작은 열쇠 하나에

반항도 없이 배를 열고 산란을 시작하는 어미

바닥에 박힌 발의 감각이 사라져버려

저린 것도 없고 마비도 없는 몸뚱어리가 되었어도

천연기념물이 될 날 멀지 않았다며

눈도 뜨지 않은 치어들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속에 홀로 웅크리고 앉아

멸종의 시대를 헤엄쳐 가는 씨받이 물고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으로 수면호흡만 하는

붉은 어종 철갑류 배불뚝이의 숙명이다

단 하나의 성 암컷만 있어 짝짓기의 계절도 오지 않는다

 

움직임을 허락받지 못한 감옥의 거리에서

쇠못에 박힌 꼬리지느러미를 바람에 씻어 잠재우는 밤

빨간 몸에 얼룩지는 가로등의 반점들이

비늘이 되고 날개가 되는 성장통을 앓는다

 

내일은 그리운 소식을 배부르게 먹었으면

   

 

♧ 모뉴먼트 벨리에서 - 황경순

 

모래알도

눈물에 적셔지면 바윗덩이가 된다는 것을

이곳, 사막에 와서 알았다

 

인디언 마을의 움막은

까칠한 사암층 벽에 하늘을 볼 수 있게 지어졌다

멀리서도 찾아 날아오는 새를 바라볼 수 있게

 

구멍 숭숭 뚫린 움막에서 굳어지는 가슴팍 풀어냈을

모래벽이 아직 뜨겁다

 

쫓기고 쫓기던 그네들은

허연 모래밭도 황야로 달구어 놓았다

 

저들만의 상형문자로 새겨진 움막 터에서

날짐승이 날고 동물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 친다

 

오랜 경직에서 벗어난 모래알들이

백의전사에 쫓기던 기억을 털어내고 있다

 

흩어지던 모래알이 다시금 붉은 영혼을 감싸안는다

 

나바호 성지 사암층이 고딕처럼 성스러운 것은

인디언들의 뼛가루가 하늘을 받쳐 들고 있기 때문이다.

   

 

♧ 독서 - 김유진

 

한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간다

 

다른 사람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뛰어서 간다

 

공터에 도착했다

모두 가고 없다

 

골목길에서 나오는 사람이 보인다

나는 일어나 옷을 턴다

 

 

♧ 겨울 청솔 - 백숙천

 

바람 없는 겨울 산기슭 둔덕

 

푸석한 땅

 

들떠 걷다 보니

 

우듬지에

 

언 하늘 이고 내려오는 청솔

 

야윈 어깨 남루 걸치시고 허이연 입김

 

머리 깊숙이 조아려 인사한다

 

마주친 눈빛 참 따스하시다.

  

 

♧ 비우고 버리다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160

 

훨씬 더 오래 산 나보다 먼저

아내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는데

 

나는 아내가 내려놓은 것까지

몽땅 짊어지고 낑낑거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바라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던 가슴

물 건너 간 지 오래

이제는 절벽처럼 먹먹하고 막막해

 

오늘은 마음속에 어떤 밥그릇을 안고

살아야 하나

스산한 봄날이 가고 세상은 푸르른데

민들레 꽃씨 하나 어딘가로 떠 가고 있다.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푸른 숲 속 길 지나 당도한 육교 난간 옆

나란히 섬처럼 놓여 있는 이방인들

사과 상자만 한 공간에서 슬픈 미소 짓고 있다

한여름 햇살에 살 에는 듯하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하다

중환자실 시한부 환자처럼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것 같다

육교 앞 키 큰 푸른 소나무

새처럼 날 수 있다면

그들에게 그늘 만들어 줄 수 있다며

안쓰럽게 바라만 보고 있다

저기 화분 속 야생화들

푸른 들판에서 뛰놀던 그 시절 그리워하고 있다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나오는

맥머피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제 머리에 전기충격 요법이나 전두엽 절제 수술 받는

한이 있더라도

화분 관리 책임자에게 끝없이 저항했을 것이다

이제 소나무 그늘에 옮겨 편히 쉬게 해 주고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그들에게

고결한 영혼의 자유 허하라고

 

 

♬ Autumn Leaves - Roger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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