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열매 - 이영지
파랗다 잎 곁에서 파랗다 더 파랗다
여름이 더운 여름 묶느라 한데 얼려
약간은 싱거우면서 떫은 맛이 파랗다
파랗다 잎을 닮아 파랗다 더 파랗다
여름이 익는 여름 묶느라 한데 묶여
약간은 못난 듯하며 열매값이 파랗다
파랗다 여름 닮아 파랗다 꼭 파랗다
긴여름 더위라도 잊느라 더 파랗다
약간은 기다리느라 발걸음이 파랗다
♧ 열매 - 김윤현
미끄러지는 곳에서 생은 늘 시작됩니다
떨어지고 구르다가 머무는 곳이 터전입니다
잎과 줄기 혹은 뿌리까지 버리고 나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도 쉽습니다
낮은 곳으로 이른다고 잃을 것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 온 몸으로 구르다 보면
낮은 곳에서도 할 일은 있으니 말입니다
부딪히지 않으려 몸가짐은 늘 둥글게 합니다
잎을 가지지 못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가지를 세우지 못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몸이 통째로 썩을 때면 새 삶은 시작되겠지요
♧ 붉은 열매 - 김종제
열매를 가르자
고苦와 통痛이 쏟아져 나왔다
열매는 모두 붉어야 한다는
신념에 시달린 적 있었다
열매는 전부 핏빛을 품어야 한다는
주장에 끌려다닌 적 있었다
혀에 입술에 달콤할수록
그것이 견뎠을 불 같은, 얼음 같은
시절을 만끽해 본 적이 있는가
오로지 붉은 빛으로만
벼랑 같은, 절벽 같은 삶을
드러낼 수 있었을 테니
모진 형벌을 거부한 것들은
그 속에 독을 지녀서
노랗거나 파랗거나 거무스름하거나
오직 붉은 열매만이
죽음의 문턱에 다달은 적 있어서
마음까지 향기로운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교한 적 있었다
하늘에 불이 난 것처럼
아침과 저녁으로 참 붉다
당신과 내가 필시
붉은 열매 같은
고해苦海의 혹성 속에 들어 있어서
반으로 갈라 나누어 먹으면
그 맛이 참 향긋하여
당신도 나도 붉게 익을 것 아닌가
♧ 열매 - 양인숙
흙은 사철 헐벗었다. 자신의 전부를 걸었기 때문, 열매를 위하여. 전부를 건다는 건 자존심마저 버리는 것이므로 가끔씩 어지러웠다. 나무가 남겨놓은 마지막 행간이 가슴에 걸렸다. 빈털터리 가을의 유서. 아름다운 침묵이 노을 속에 깔린다. 오백 생의 인연으로 눈 먼 거북 등에 가까스로 올라온 장작개비. 세상에서 가장 눈부셨던 나무의 노래, 그토록 뜨거웠던 기억을 간직한 채 서슬 푸르게 피워내던 잎사귀. 한 나무가 밀어 올린 허공의 무게만큼 그토록 오랜 짓무름을 이겨낸 가슴팍에 속살 깊이 박힌 여름의 고뇌를, 나무가 피워 올린 살의 떨림에 온 귀를 열어 볼 수 있을까. 흙은 조금씩 견고한 고독의 나이테를 허물었다. 제 살을 헤집으며 혈흔으로 얼룩진 옹이. 속 앓이는 단단해지고 버림으로써 이룰 수 있다는 묵상의 깊은 멍울. 한 열매를 위한 소신공양의 노을 앞에서 흙은 수만 번의 발길질을 견딘다. 열매는 흙의 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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