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꽃시집 '금강초롱'

김창집 2016. 10. 15. 09:56


꽃피는 밤 창가에서


창은 기억의 꽃이 피는 항구

기억이 소유하는 그리운 사람들이

의식의 까마귀를 날리며

무시로 목선을 타고 출항한다

암흑의 바다 위로

사상의 골편들이 무겁게 떠오르는

영혼은 하늘 가득 날아갔다가

언제나 자유를 노래하며 돌아온다

바람이 뽀얀 배꼽을 내놓고

영혼의 안경을 닦고 있으면

의식의 내면으로 흐르는 물결 따라

꽃은 화안히 대낮처럼 열린다

신들은 돌다리 밑에서 미역감으며

값싼 철학으로 영혼의 피부를

끝없이 문지르고 있다

항아리는 어둠의 여울목에서

무게 많은 감정의 달을 잉태하고

그 차가운 달 측면의 감촉으로

가슴을 여는 밤구름

깊은 사유의 중간쯤

나의 방황은 태동을 느낀다

        

 

헌화가獻花歌


그대는 어디서

오셨나요

그윽히 바윗가에 피어 있는 꽃

봄 먹어 짙붉게 타오르는

춘삼월 두견새 뒷산에 울어

그대는 냇가에 발 담그고

먼 하늘만 바라다 보셨나요

바위병풍 둘러친

천 길 바닷가 철쭉꽃

바닷속에 흔들리는 걸

그대는 하늘만 바라다보고

볼 붉혀 그윽히 웃으셨나요

꽃 꺾어 받자온 하이얀 손

떨려옴은 당신의 한 말씀 탓

그대는 진분홍 가슴만 열고.

    

 

 

갯쑥부쟁이

 

눈 속에서도 자주꽃을 피우고

땅에 바짝 엎드려 있던

계집애, 잊었구나, 했더니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 나라 남쪽 바다 우도牛島 기슭에.

        

 

용담꽃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돌아와 서성이는 텅 빈 안마당에

스산히 마른 가슴만 홀로 서걱이는데

소리치며 달리던 초록빛 바람하며

이제와 불꽃 육신 스스로 태우는 산천

서리하늘 찬바람에 기러기 떠도

입 꼭꼭 다물고 떠나버린 사람아

달빛에 젖은 몸이 허기가 져서

너울너울 천지간에 흐늑이는데

잔칫집 불빛처럼 화안히 피어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하리라*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

*용담의 꽃말

        

 

메밀꽃


소복을 한 젊은 여자가

달빛과 달빛 사일 오가며

천상에서 바래인 옥양목 한 필을

산간에 펼쳐 널고 있다

겨드랑이 아래로 사태 지는 그리움

저 서늘한 불빛으로 달래며

천년을 사루어도 다 못할 정을

하얀 꽃으로 피우고 있다

달이 이울면 산이 쓸리고

반쯤 젖어 흔들리는 고운 목소리

알몸의 어둠을 하얗게 밝히고 있다.

        

 

꽃 지는 날

 

마음에 마음 하나

겹치는 것도 버거워라

 

누가 갔길래

그 자리 꽃이 지는지

 

그림자에 꽃잎 하나

내려앉아도

 

곡비 같은 여자 하나

흔들리고 있네.

    

 

무화과無花果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뜬 사내 하나 있다.

 

    

 

갈대

 

올 때 되면 올 데로 오고

갈 때 되면 갈 데로 가는

철새들이 오는 걸 미리 알고

무리 지은 갈대는 꽃을 피워

하늘을 향해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저 새들이 날갯짓이

갈대를 따뜻하게 했으니

갈대는 스스로 몸을 꺾어

날갯죽지에 부리를 묻고 밤을 지새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강물은 새들의 시린 꿈이 안쓰러워

소리죽여 울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깊은 밤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이여

바람소리에 흔들리지 마라

허기진 네 영혼이 이 밤을 도와

강물 따라 등불 밝힌 마을에 닿을 때면

잠든 새들을 지켜 주던 별들은

충혈된 눈을 이슬로 닦으며 스러지고

갈대는 사내처럼 떠나버린 새들이 그리워

또 한 해를 기다리는 것이다.


   *홍해리 꽃시집 '금강초롱'(우리詩 시인선 030, 도서출판 움,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