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벌써 보리가 익어가네

김창집 2017. 5. 12. 22:27


오름에 가기로 한 날인데

비가 내린다.

더러는 고만고만한 이유로 불참하고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비가 와 땅이 질고

풀이 젖어 있어

원래 계획한 곳으로 가지 못하고

바다 가까이에 있는 오름으로 간다.

 

비는 생각한 만큼 내리지 않아

오름 하나를 돌고도

절구경도 하고,

해변으로 나 있는 올레18코스

일부를 걷다가 보리밭을 만났다.

 

옛날에는 주변이 거의 보리밭이었는데

지금은 감귤 과수원이거나

비닐하우스 또는 채소밭이거나

빈 밭이라 보리밭은 드물다.

보리 종자는 대부분 맥주보리이고

일찍 파종하여 벌써 익어간다.

보리가 쓰러진 밭도 있었는데,

날씨가 벌써 더워져서

올 처음으로 뻐꾸기 소리 듣다.

     

 

4, 5월 보리밭에서 - 고재종

 

보리이삭들 가시로 솟았네

찬 겨울 견디는 새

갈가리 찢겨 견디는 속,

가시로 솟아 찌르는 거

무심했던 하늘 찌르는 거

 

찌르는 건 하늘만 아니다

그 겨울 모진 바람에

주눅들려 게게 풀린

내 눈 찔러, 시리게 찔러

천지간에 피사태났다

질펀한 피사태 났다

푸른 피 뚝뚝 듣는 4, 5

그 함성

그 가시로 솟은 함성에

하늘도 울고 나도 울어

푸르른 세상 이루었다

 

왜 알잖겠느냐 푸른 세상은

인동(忍冬)의 보리들 가시 이삭으로

솟아야 찔러야 오는 내력을,

끝내는 모두 다 피흘려야 온다는

눈물겨운 내력을

 

 

 

보리밭에서 - 김종제


매서운 서릿발 아랑곳하지 않고

보리 시퍼렇게 일어선다

들판의 흰눈 이불을 걷고

뇌성벽력 보리수의 바다가 출렁인다

저 보리밭에서

타오르는 불의 향기로운 과일

보리菩提를 찾는다면

일어선 보리 하나하나가

염원의 탑을 세운 것이라면

온 누리의 겨울에 보시布施

빛이 열린 것이라면

소리가 열린 것이라면

심어 거둘 때까지

식지 않으리라 단단하게 마음먹는다

눈 풀리고 가슴 풀리는

이 때쯤 해서

보리밭의 저 보리

우러러 뵙기 가장 좋아

빗장을 걷고 들어선다

푸드득 중천에 나무를 깎아 만든

새가 날아간다

햇빛 밝은 자리에

도가니 끓는 쇳물을 붓고 있다

어둠에 시달린 새벽이 환해진다

탕감해준 죄로 그만큼 가벼워졌으니

어느새 줄기는 곧고 속은 다 비웠다

보리밭에서

문턱까지 턱밑까지

남은 내 생을 보시布施하려고

언 땅 녹여줄 보리菩提를 찾는다

     

 

보리밭. 2 - 김영천 

 

보리누름이 한참이다

갯바람들이 그 위로 수런거리며 지나가긴 하지만

쉬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더러 함부로 쓰러진 곳이 있다

갑자기 길을 잃은 바람이 한동안

머뭇거리었던 것일까

깜부기 입에 탈탈 털어넣어도 보고

삘릴릴리 삘릴릴리 보리피리도 불어보고

그렇게 한참이나 누웠다 갔을까

밭둑으로 푸르게 돋은 잡풀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바람의 길을 연다

후적후적 걸어나오니

 

그러면 내 한 평생이 바람인가?

 

 

 

보리밭 - 진상록

 

슬픔의 바다가 있다

 

빈집 건너 빈집이

들어오라고

쉬었다 가라고

손짓하는 고향

굽이굽이 돌아가다 보니

산허리쯤에

슬픔을 묻은 한 마지기 바다가 있다

 

시퍼렇게 날 선 파도

덮칠 듯

껴안을 듯

나를 조롱하는 바다

 

드러눕고 싶었던 초원

유년시절 깔깔거리던 추억

어디로 다 가버렸는가

사라진 흔적조차 없이

이제는

아픔을 등지고 사는

고난의 바다

 

바다 한가운데

나를 닮은 한 사람이

출렁이는 바닷길을 노도 없이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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