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와 아이들 - 정군칠
게들은 어쩌자고
밀물을 따라와선
바지락바지락 서귀포를 끌고 가나
바다는 어쩌자고
게들을 몰고 와선
한 양푼이 푸우 거품을 쏟아놓나
어쩌자고 나는
또
자꾸만 헛딛는 어린 게의 집게발에 목이 메어
은종소리 쟁쟁거리는 그늘로
스며들고 있나
-그림이 시고 시가 그림이다.
그림의 어원이 ‘그리워 그리다’라고도 하던데
생전 꼿꼿했던 정군칠 시인이 그립다.
어쩌자고 나는 또 그림 속 서귀포 바닷가를 걷는가.
발끝이 은종소리로 젖는다. [글 양대영 시인]
♧ 오래된 돌담 - 황금녀
밭담길을 걷다가
오래된 돌담에
손을 얹었다
여든의 내 손등 같다
바람 막아내느라
고생했다 고생했다
서로를 위로하고
가만히 쓰다듬는
저녁답
-제주의 모진 바람을 막아주려 쌓은 밭담길을 걷는다.
돌로 쌓은 밭담으로 바람의 숨통이 들락날락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야 사나운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정끝별 시인의 시가 밀물되어 겹쳐오는 황금녀 시인의 시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유정하여 다정해지는 저녁답. [글 양대영 시인]
♧ 제주수선화 6 - 김순이
겨울새의 젖은 깃 소리
마른 들녘을 스친다
한 송이 겨울 꽃 되랴
더욱 깊이 간직할 이름을 위하여
멀어라
너무 멀어라
마음으로만 손을 잡는
그대
-수선화는 겨울새의 젖은 깃 소리를 먹고 눈을 떴다.
겨울이 낳은 향기로운 보얀 알이다.
먼데서 온 향기를 잡을 수 없다.
멀리 가는 향기를 가둘 수 없다.
그저 눈부처로 담았다, 도리없이 배웅할 뿐이다. [글 양대영 시인]
♧ 대설 - 오승철
성산포 가는 길은
일출봉 쫓아가는 길
붙잡거나 놓치거나, 무밭 하나 무덤하나
무심한 어느 저녁에 이 악물듯 눈이 온다.
-우리는 무엇을 쫓아가나
빛나는 것을 쫓아가나
그것이 희망이냐, 은전이냐
그래봤자,
우리는 모두 간다
이 악물듯 눈이 오고, 눈은 녹는다. [글 양대영 시인]
♧ 비 오는 날 터미널에서 국밥을 먹으며 - 나기철
두 여자가
날 밥 먹여 왔구나
스물일곱 살 때까지는
돌아가신 어머니
그 후론
아내
-여자의 몸을 빌어 태어나
여자의 손을 빌어 밥을 먹는다.
어머니와 아내다.
여성의 모성으로 세상은
한껏 둥글어진다.
이응으로 시작하는 어머니와
아내라는 이름마다 눈물이 아롱진다. [글 양대영 시인]
* 양대영 시평집『탐나 국시』(도서출판 시와 실천,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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