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혜향문학' 2021 상반기호의 초대시

김창집 2021. 6. 23. 10:27

풀숲이 환해졌다 - 조남훈

 

문득, 숲속이 환해졌다

 

산비알 콩밭 매던 여인

호미를 냅다 팽개치고는

황급히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눈이 부시도록 허여므레 푸짐펑펑한 엉덩이에

누가 난을 치는지 붓 끝이 환해지도록 일렁이고

내 가슴 덩달아 달아올랐다

산새들도 안절부절 지줄대고

바람도 설레며 후끈거렸다

 

, 어디다 낙관을 치랴

 

오늘이 김성춘

 

차렷,

마음 쉬엇,

 

번개가 치는 걸 보고도

번개를 깨닫지 못하다니!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발밑이 별똥밭임을 발견 못하다니!

 

아침마다 해골을 만지고도 해골이 될 내일을

생각 못하다니!

 

하이고……

달라이 라마 스승께서 웃고 계신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웃고 계신다

 

바다를 암각하다 신필영

 

고래가 돌아온다, 파도를 앞세우고

돌 속에 잠들었던 신석기가 돌아온다

누군가 겉봉도 없이

전해주신 만지장서滿紙長書

 

청동빛 이두박근 푸른 작살 움켜잡고

우우, 몰려드는 함성만은 묵음처리

바위에 우뚝한 고래

환생으로 지나간다

 

누천년 지켜왔을 사내들의 격한 숨결

저만치 밀려 나간 수평을 끌고 온다

바다가 걸어 논 무쇠솥

햇덩이가 익는다

 

호모 마스크스 - 김수열

 

집안만이 물 밖이다

집 밖으로 나선다는 건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마스크 없으면 물속으로 갈 수가 없다

가서는 안 된다 마주 오는 마스크와 마주치면

내외를 하거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차 한 잔 마실 수도 없다

남녀는 물론이고 노소도 예외가 없다

마스크가 마스크에게 말을 걸고

마스크와 마스크가 마스크 때문에 언성을 높인다

여분의 마스크가 구원이고 신의 은총이다

집밖은 언제나 깊은 물속이다

 

마스크가 바람에 펄럭인다

잎 떨어진 가지에 마스크가 나부낀다

빨간 마스크 파란 마스크 노란 마스크 검은 마스크

공항의 감시견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마스크다

승객은 물론이고 비행기도 마스크를 쓴다

공항의 돌하르방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마스크가 바람을 이끌고 낙엽처럼 나뒹군다

공원의 비둘기는 마스크에 발 묶여 허우적거리고

늙은 어부의 그물에는 해파리 대신 마스크가 올라온다

 

한 해에 6백억 마리의 닭 뼈가 지층을 이루는 지금이다

집안에 들어서야 마스크 벗고 숨비질하는 오늘이다

 

살구나무죽비 - 임성구

 

무쇠 같은 하루가 노을에 닿는 시간

시퍼런 몸에 감춰진 찌든 먼지 털어낸다

 

속 비운

살구나무죽비

내 등에서 꽃 핀다

 

꽉 막힌 혈전들이 녹아내리는 몸 속 행간

천 년 전 바람 냄새 스멀스멀 배어들면

 

그 봄을

기억하는 살구

몸의 터널 환하다

 

희나리 김미정

 

아직 덜 마른 시간, 그 밖을 애돕니다

 

그대는 흔들리고 이따금 사라져서

 

뭉클한 노을빛에도 다가설 수 없어서

 

 

깊숙이 젖어 들어 못 다한 말 건넵니다

 

타다만 기억 따라 그늘은 깊어져서

 

눈시울 붉어진 채로 그대에게 갑니다

 

 

                                           *혜향문학(혜향문학회, 2021 상반기호)에서

                                                   * 사진 : 수련(부여 궁남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