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를 내리다
유리 액자에 표구된 시詩가 발칵 뒤집혔다
뾰족한 모서리에 금이 가고 말았다
뾰족한 한 마디에 금이 가고 말았다
수소문 끝에 재활용 마대 봉투를 구했다
수소문 끝에 재활용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잘게 깨서 넣으려고 신문지 덮고 밟았지만
잘게 깨서 쓴 구절들 저장하고 덮었지만
생각만큼 호락호락 조각나지 않았다
생각만큼 호락호락 써지질 않았다
시詩에 손자국이라도 묻을까 막아주던 유리
시詩에 눈길이라도 주라고 보냈던 첫 시집
가까스로 손 베이지 않을 만큼 깨뜨려서
가까스로 눈 아프지 않을 만큼 바탕체로 써서
조각들 수습하고 마대 봉투에 쑤셔 넣었다
시어들 수습하고 출판사로 쓱 보냈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닌 듯 잊어버리고 살 일이다
♧ 동전
살면서 옴짝달싹 못 해 멈춰선 적 몇 번일까?
지폐에 치이고, 신용카드에 밀리고 어느 날 스마트폰엔 제대로 한 방 먹있지. 하나둘 생기다 보면 점점 무겁고 귀찮아져 켜켜이 쌓아 올렸다 부숴버리는 날도 있었지. 은행에서 지폐로 바꾸려 해도 눈치 보이고 때로는 월급마지 동전으로만 받았다지. 자판기 구멍엔 제집 드나들 듯 쇼핑카트 구멍엔 하나가 아쉬운…, 1원짜리 5원짜리 10원짜리 100원짜리 제일 큰 500원짜리 거기에도 서열은 있다. 둥글게 살다가 굴러가 버리면 잊히지만 땅바닥에 내팽개쳐져도 찌그러지진 않는다. 세상에 나온 지 좀 되었지만 지폐처럼 찢어지지 않고 그저, 그저 탈색만 될 뿐 마음 변한적 없는
구르고 또 구르고 싶은 1965년도 동전 한 닢
♧ 물티슈
물 머금고 살다 보면
더러워질 수 있는 거다
아파트 견본주택 구경이나 와 달라고
전단지 나눠주면서 얹어주던 사람들
때 묻은 세상 문틈 거침없이 닦으라고
메마른 속엣말도 촉촉이 적시라고
오늘은 차 손잡이에 누군가 꽂고 갔다
나 그토록 온몸 다해 눈물 흘린 적 있었던가
시나브로 시간이 흘러 그 안의 물 다 빠지기 전
내 눈물 ‘톡’, ‘톡’, ‘톡’ 뽑아
그대 티끌 닦아 주리라
♧ 전동드릴
또다시 리모델링 공사 간헐적인 드릴 소리
천장 다 뜯어내고 바닥도 새로 깔고
누군들 초췌해진 몸 뒤엎은 적 없었으랴
그렇게 뚫고 빼고 메우고 떼어내고
한 껍질만 벗겨내도 새살이 돋으려면
살얼음 건너가는 일 숱하게 많다는데
정글 같은 도시에서 계곡 같은 이 땅에서
한 마리 들짐승이 드르륵드르륵 울어댄다
한밤중 코 고는 소리, 남자도 그렇게 운다
♧ 스테이플러를 박다
수십 장 서류 결탁할 땐
어떤 관계 되냐면
한통속 그 안에서
무슨 일 생기냐면
순서가 정해지면서
주主와 종從이 굳혀지지
첫 장과 마지막 장
엔간해선 못 뒤집어
철제이빨 ‘철컥’하고
정통으로 박힌 후엔
쪽 번호 매겨진 대로
은연중에 사는 거지
♧ 도서관 구내식당과 책갈피
정식 삼천 오백 원 라면 이천 삼백 원
김밥 천 삼백 원 개인 운영 식당이라
벽면엔 '외부 음식 반입 금지' 안내문 붙어있다
시집 한 시간 읽는 사람 고시 공부 십 년 하는 사람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용한 도서관 시중보다 저렴해 언제나 단출한 구내식당 메뉴에 익숙해지는 모습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만추의 정오 무렵 집밥보다 더 자주 먹는 그 식판의 그 밥 사열하듯 직각으로 십진 분류표 적용된 수만 권의 책들이 있는 2층 자료실엔 몇 해 동안 읽지 않은 책 뽀얀 먼지 가득하고 그 인적 없는 곳에 망부석이 여럿이다 자료 검색으로 찾아낸 빛바랜 시집들 행간에 잔뜩 낀 곰팡이를 거둬냈다 저자의 이름들이 ㄱㄴ순으로 꽂혀 있는 저 뭉크의 절규가 들리는 숲속엔 반백의 중년 발소리 죽이고 걸어가는 서가와 서가 사이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백날 밤, 천 일 밤을 펜을 잡고 지새운 불멸의 거죽들 책에 굶주린 듯 밥에 굶주린 듯 세상에 굶주린 듯 이윽고 “라면 하나, 김밥 하나 나왔어요” 식판을 받아들고 빈자리에 앉으면
식권이 책갈피로 끼워지는 내 자서전의 중간쯤
*조한일 시집 『나를 서성이다』(시와 실천, 2021)에서
*사진 :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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