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나에게 독한 소주였다
알코올 중독
길지 않은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네 맑은 영혼 쓰디쓰게
내 빈 가슴에 쏟아 붓고
괴롭다며 발버둥치다가도
이내 그립다며
다시 네 차가운 입술 목말라 찾는,
나는 너에게 중독되었다
♧ 나는 오늘도 너를 마시고 싶다
몽롱한 비취빛, 매끄러운
네 살결을 탐해서가 아니다
긴 목으로부터 흘러내린, 부드러운
가슴 선線의 아름다움에 혹해서도 아니다
기울여도 평정을 유지하고
출렁이다가도 갈앉는
맑디맑은 내 영혼에 흠뻑 취하여
탁한 나를 쓰려뜨려야 한다
내 작은 잔에, 오늘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부은, 너
빈 가슴에 머리 기대어
먼 취밭목 솔바람 소리 듣고 싶다, 소주
참 진眞 풀꽃 이슬 같은
♧ 환절기 독감에 대한 처방전
가슴 답답하여 말은 하고 싶으나 목이 잠기고
시도 때도 없이 미열은 일어, 정신은 멍하니
걸음은 자꾸 허방을 짚는 듯 허정이고
신열이 도지는 한밤중, 식은땀에
냉수를 연거푸 들이켜도 갈증 가시지 않는다 하니
아마 예전에도 앓아본 경험이 있는
그리움이라는 환절기 독감이 심하군요
여기 소주(또는 약주) 몇 병을 처방할 테니
1일 1회 퇴근 직후 30분부터
한 병을 일곱 잔으로 나누어 마시세요
그리고 3일 후에 다시 오세요, 자! 다음 환자분!
♧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알게 모르게 조개골 조금씩 푸르르고
물소리 한층 목청을 돋우었다
상수리 숲 땅거미 종종대며 내려간 뒤
문득, 소소리 바람에 실려오는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하나
혼자 마신 몇 잔의 소주 목에 걸리누나
칠七형제 침봉針峰 고스란히 남겨 둔
아직 한창일 사람아
숨죽여 찾아 간 그곳
오를 산이 없다면 다시 돌아오라
골 깊은 장당골 동고비도
돌아와 둥지를 틀었다
동강 난 이 땅의 산행이지만
나와 그대의 해 질 무렵은
온 산 불 지르는 단풍이려니
가슴 들끓이던 어린 날
늘상 어깨동무로 오르던 신밭꼴
지금 몽실몽실 달 뜨고
탱자 울 안 능금꽃은 부풀어 부풀어
♧ 한없이 투명한 너를 두고
한없이 투명한 너를 두고, 허다히
허기진 몸에는 독毒이라 말하지만
시인의 타는 갈증에는
쉼 없이 샘솟게 하는 시심詩心의 샘이다
낡은 TV의 노이즈현상 같은 먼 기억 속
견딜 수 없이 몰아치던 사춘기 존재의 불안감에
차라리 황량한 모래바람의 텍사스로 가겠다며
늦은 미아리 행 버스를 탈 때도 그랬지만
너로 하여 간덩이 부은 놈 소릴 듣는다 해도
나는 너를 마실 것이며
덕지덕지, 때 엉겨 붙은 내 영혼을
입동을 며칠 앞둔, 저 쑥밭재
잿마루처럼 씻어내고 싶다
아! 진정, 나의 산 같은 소주여! 소주 같은 산이여!
참 진眞, 이슬 로露, 참 진眞, 이슬 로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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