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데없는 공부 - 김대용
매주 휴일이면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
이제는 매일 휴일이므로 매일 버려야 한다.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라고 쌓아둔 것들이 많다
쉬 버릴 수 없는 것들 쓸데없는 것들이 어디 있냐고
버티던 의복은 제일 쓸모없는 것들이다
아직도 입을 만한데 유행에 쳐진 것들이나
그들 중 부피가 큰 겨울옷은 더욱 그렇다
추위가 오면 입어냐지 그런데 어딜 가려고
항상 생각이 짧았다 안 쓰는 물건들 모아
아름다운 가게에도 몇 짐 부리고 나서도
이제는 정말로 무거운 책들이 많이 남았다
이것들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내 청춘의 밑줄
그어진 책들 가슴으로 스며든
녹슨 가래 같은 한글이 아니므로 더욱이
아랍어로 된 이 묵힌 것들을 어떻게 할까
하루살이 신문 월세 내는 월간지 그리고 정년이 된
전공서적은 버린다.
그리고 나에게 보내준 시집들은 그냥 두기로 한다.
♧ 순종 - 김순선
당기세요.
우린 참 불편한 관계다
내가 가까이 가는 것을 거부하듯
그대의 무게가 나를 자꾸
밀어낸다
여기까지 용기를 내어 찾아왔는데
거절 아닌 거절 같은
한 발 뒤로 물러서라니
그렇다고 그대가 내게로 걸어오겠다는
약속도 아니면서
그래도
당기세요
댄스를 신청하듯
공손히 예의를 갖춰
오른발을 사뿐히 뒤로
무릎 굽히면서
투명한 사각하늘을 향하여
구름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춤을 추듯
당기세요.
우린 참 불편한 관계다
내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더 멀어진 듯
♧ 광주 – 김승립
매맞은 땅, 매맞은 도시
매맞은 하늘, 매맞은 바람, 매맞은 빗방울
매맞은 꽃나무, 그리고 매맞은… 사람들
아무런 잘못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시민이라는 이유로, 그냥 살아 있다는 이유로
땅 위를 걸어가는 이유로
그냥 주먹밥을 나눠줬다는 이유로
자유를, 민주주의를, 최소한의 권리를 외쳤다는 이유로
무참히 총검에 찢긴 땅, 십자가에 꽝! 꽝! 못 박힌 땅
맞아죽은 사람들이 피가 하늘에 땅에
나무에 바람에 비릿하게 새겨져 있는데
아직도 빨갱이니 폭도니 불순분자니
애초부터 반역의 땅이니
밀도 아닌 말로 낙인찍힌 땅
되도 않는 말로 핍박 받는 땅
그리고 언제 멈출지 모르는 피울음을
가슴에 끅끅 새겨
살아가는… 사람들
♧ 공황장애 – 김원욱
벌렁거린다고? 두근거린다고? 가끔 그렇게 스러지다가 공중으로 휙휙 날아다닐 때 웅성거리는 거친 기억 알갱이 뚝뚝 떨구는 정신의 저쪽 초신성처럼 타올라서 막다른 골목에서 바라보는 가뭇없는 블랙홀, 시공의 경계를 넘나드는 왁왁한 한쪽은 늘 그렇게 사그라져서 서천꽃밭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담아둘 수 없는 오랜 기억의 숲, 별무리 터지는 소리만 팔랑대는 공중에서 거친 몸뚱이 하나로도 환해지는 내 안 깊은 곳 시원히 소리를 뚫고 덜컹덜컹 달려오는 이 누구인가 가끔 그렇게 북망산 기슭에서 혁명군 말발굽처럼 밀려오는 북소리 여름날 시궁창에 버려진 이름처럼 잘 삭힌 홍어의 휑한 눈망울처럼 몰각, 몰각이라고?
♧ 곱들락 제주어 – 김항신
우리 일루후제를 위ᄒᆞ여
제주어 베와보게
세종대왕 숨절 돔겨 이신
곱들락ᄒᆞᆫ 제주어
서펜덜에 가민 알작지가
자그락자그락 ᄌᆞ잘ᄌᆞ잘
동펜덜에 가민 둠벵이 속읍
폴짝폴짝 히염 치는 엿-장시
미네기도 ᄑᆞ릇ᄑᆞ릇
올렝이도 곱들락
우리 일루후제 위ᄒᆞ여
펜안ᄒᆞᆸ디강
펜안 헤시냐
오널도 지꺼지게
복삭 속앗수다예
* 계간 『제주작가』 2022년 가을호(통권78호)에서
* 단풍 : 대둔산 초입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의 시(2) (0) | 2022.11.07 |
---|---|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의 시(4) (0) | 2022.11.06 |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의 시(2) (1) | 2022.11.03 |
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의 시조(1) (0) | 2022.11.02 |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의 시(3) (0) | 2022.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