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시아문如是我聞
1.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바둑을 두며 친구를 얻고
평화를 얻고 교훈을 얻고
심오한 뜻을 깨우치고
결국에 첨수를 누리리라
나는 이렇게 들었다
2
승부의 세계에 친구가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친구이기에 승부를 겨룰 수 있다
술수와 간계가 아닌
승부를 걸 수 있는 친구가 앞에 있다
응원해주는 사람보다
승부의 세계로 같이 걸어주는 사람이
진정 친구라고 나는 들었다
3
한 수 한 수
내가 말을 하고 친구가 말을 듣고
화답을 하고
산사에서 스님이 목탁 치는 소리마냥
딱딱
딱딱
이기고 지는 가운데 교훈을 얻고
서로를 인정할 때 평화를 얻는다고
나는 들었다
4
혼자 가는 길은 편견이 생기리니
여럿이 같이 가다 보면
더 좋은 길
진정 옳은 길을 갈 수 있으니
대국을 하는 것은
심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들었다
5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도록
집중하고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
신선놀음이라는 바둑이라고 들었다
매사 ‘빨리 빨리’를 외치는 시대지만
하나 둘 셋 세는 계시기 소리가 상념을 방해하지만
한 번쯤은 모든 것을 잊고 훨훨 날아가 보거라
깊은 내면의 세계에 나를 담글 때 천수를 누린다고
나는 들었다
♧ 꽃놀이패
싸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목숨을 내걸고 하는 싸움인데
그가 잃는 것은
조그만 공터 하나에 불과했다
머리띠 동여매고 기본 시급 일만 원 외칠 때
그는 팔만 원 하는 뷔페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갈수록 올라가는 집세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노동자들의 기본급 천 원 올라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 귀삼수
아무리 버둥쳐도 삶의 길이 3수뿐
얼핏 상대를 제압하고 살 듯한데
조여 오는 삶의 무게
늘어나지 않는 살림살이
우리들을 살릴 용이 태어난다는
개천은 마른지 오래고
하늘을 가리는 복개공사로
어둠 속을 폐수 속에 사는 동안
위에서는 권력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맞붙어 싸우려 해도 안 되고
도망가려 해도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활로가 사라졌다
누구에게나 있다던 세 번의 기회는
아무 필요 없었다
♧ 귀살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겨우 콧구멍 두 개 열어
숨을 쉬는 대가로 놈은
사방의 땅을 다 받아갔다
생불여사라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고 했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살아가며
한 판의 대국은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 또한
재미있는 삶이었다고
그렇게 씁쓸하게 말하며
주섬주섬 돌을 거둘 것이다
생불여사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슬픈 귀살이
♧ 바둑돌
1
하나 다를 게 없는 녀석들인데
주변에 잘 사는 친구가 있는지
강남에 사는지
집도 많은 친구인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바둑돌
하나하나 돌을 쌓아 집을 만든다
2
바둑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두가 평등해서이다
장기나 체스처럼 왕이 있어
모두 그 왕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하는
그런 아픔보다
친구가 나를 위해 힘이 돼주고
친구가 없으면 외로워지는 게
우리의 삶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왕이 다스리는 세월이 있었지만
바둑이 탄생한 몇 천 년 전에는
모두가 평등한
그런 세상이었을 거란 생각이
내가 바둑을 사랑하는 이유다
*양동림 시집 『여시아문如是我聞』(한그루, 2023)에서
* 사진 : 알프스의 사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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