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양동림 시집 '여시아문'의 시(3)

김창집 2023. 8. 25. 00:06

 

 

여시아문如是我聞

 

 

1.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바둑을 두며 친구를 얻고

평화를 얻고 교훈을 얻고

심오한 뜻을 깨우치고

결국에 첨수를 누리리라

나는 이렇게 들었다

 

2

승부의 세계에 친구가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친구이기에 승부를 겨룰 수 있다

술수와 간계가 아닌

승부를 걸 수 있는 친구가 앞에 있다

응원해주는 사람보다

승부의 세계로 같이 걸어주는 사람이

진정 친구라고 나는 들었다

 

3

한 수 한 수

내가 말을 하고 친구가 말을 듣고

화답을 하고

산사에서 스님이 목탁 치는 소리마냥

딱딱

딱딱

이기고 지는 가운데 교훈을 얻고

서로를 인정할 때 평화를 얻는다고

나는 들었다

 

4

혼자 가는 길은 편견이 생기리니

여럿이 같이 가다 보면

더 좋은 길

진정 옳은 길을 갈 수 있으니

대국을 하는 것은

심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들었다

 

5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도록

집중하고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

신선놀음이라는 바둑이라고 들었다

매사 빨리 빨리를 외치는 시대지만

하나 둘 셋 세는 계시기 소리가 상념을 방해하지만

한 번쯤은 모든 것을 잊고 훨훨 날아가 보거라

깊은 내면의 세계에 나를 담글 때 천수를 누린다고

나는 들었다

 

 

 

 

꽃놀이패

 

 

싸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목숨을 내걸고 하는 싸움인데

그가 잃는 것은

조그만 공터 하나에 불과했다

머리띠 동여매고 기본 시급 일만 원 외칠 때

그는 팔만 원 하는 뷔페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갈수록 올라가는 집세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노동자들의 기본급 천 원 올라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귀삼수

 

 

아무리 버둥쳐도 삶의 길이 3수뿐

얼핏 상대를 제압하고 살 듯한데

조여 오는 삶의 무게

늘어나지 않는 살림살이

우리들을 살릴 용이 태어난다는

개천은 마른지 오래고

하늘을 가리는 복개공사로

어둠 속을 폐수 속에 사는 동안

위에서는 권력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

맞붙어 싸우려 해도 안 되고

도망가려 해도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활로가 사라졌다

누구에게나 있다던 세 번의 기회는

아무 필요 없었다

 

 

 

 

귀살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겨우 콧구멍 두 개 열어

숨을 쉬는 대가로 놈은

사방의 땅을 다 받아갔다

 

생불여사라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고 했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살아가며

한 판의 대국은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 또한

재미있는 삶이었다고

그렇게 씁쓸하게 말하며

주섬주섬 돌을 거둘 것이다

 

생불여사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슬픈 귀살이

 

 

 

 

바둑돌

 

 

1

하나 다를 게 없는 녀석들인데

주변에 잘 사는 친구가 있는지

강남에 사는지

집도 많은 친구인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바둑돌

하나하나 돌을 쌓아 집을 만든다

 

2

바둑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두가 평등해서이다

장기나 체스처럼 왕이 있어

모두 그 왕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하는

그런 아픔보다

친구가 나를 위해 힘이 돼주고

친구가 없으면 외로워지는 게

우리의 삶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왕이 다스리는 세월이 있었지만

바둑이 탄생한 몇 천 년 전에는

모두가 평등한

그런 세상이었을 거란 생각이

내가 바둑을 사랑하는 이유다

 

 

                                         *양동림 시집 여시아문如是我聞(한그루, 2023)에서

                                                             * 사진 : 알프스의 사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