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개혁과 개방, 어디까지(끝)

김창집 2005. 4. 23. 09:33

--- 상해·소주·장가계 답사기(2005. 2. 25.∼3. 1.)

 


 

* 상해의 자랑 명주탑 윗 부분

 

 

▲ 세계를 향한 전초기지 포동(浦東)

 

 첫날 상해를 거쳐 쑤저우를 답사할 때나 마지막날 상해를 돌아볼 때 가이드는 포동(浦東) 얘기를 자주 했다. 중국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로운 용(龍)을 키울 곳, 이곳이 포동이라 했다. 중국은 황포강(黃浦江)의 동쪽 논과 갈대가 우거져 있던 이곳에 새로운 거대 도시를 세우고 세계를 향하는 전초기지를 건설하였다. 우리 나라 서울로 치면 포서(浦西) 지역은 옛 서울이고, 이곳은 강남(江南)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번에 우리 차의 가이드는 멀쑥한 엔벤 총각 전광용 씨다. 나는 소설 '꺼삐딴 리'를 쓴 소설가 전광용 선생과 동명(同名)이어서 그 사실을 얘기했더니, 누군가에게 한 번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정장이 잘 어울리고 얼굴도 촌스럽지 않고 말씨도 세련된 편이어서 애인이 있냐고 물었더니, 3년 동안 벌어야 장가를 갈 수 있다면서 대답을 피한다. 한국 관광객들이 중국에 돈을 푸는 대신 우리 동포들이 가이드로 더러 그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상해(上海)는 1992년 중국 공산당 제14차 당 대회에서 상해의 포동지구 개발이 중국 전체 개발을 위한 주요 프로젝트로 결정됨으로써 정책적인 추진력을 얻어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에 이곳에 왔을 때 더운 중에도 건설에 열중인 도시의 편린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는 새로 지은 호텔에 묵었었고,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새로 짓는 건물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대나무다.

 

 서울의 넓이인 605㎢에 육박하는 522㎢인 포동은 일단 1990년 4월 18일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와 국무원에 의해 포동신구로 명명되고 경제특구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받는다. 이 지역의 기본 개방구상은 1개의 용의 머리와 3개의 중심으로 집약되는데, 머리는 상해 포동신구를, 3개의 중심은 경제, 무역, 금융의 중심을 의미한다. 포동지구 개발을 핵심으로 해서 거주 인구 4억의 양자강 유역 전체를 리드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 나간다는 것이다.

 


 

* 노신공원에서 운동하는 노인들

 

 

▲ 파란만장한 상해의 역사

 

 상하이(上海, Shanghai)는 양쯔강(揚子江) 하구에 있는 중국 최대 도시로 2000년을 기준으로 면적 6,200㎢에 인구는 1,674만 명으로 추정된다. 정식 명칭은 상하이직할시인데, 행정적으로는 성(省)과 동격인 중앙정부 직할시이다. 시역(市域)은 시가지부의 10구(區), 교외부의 10현(縣)으로 나뉜다. 시가지는 양쯔강 어귀의 남안(南岸), 황푸강[黃浦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양쯔강 어귀의 충밍섬[崇明島]을 포함시키고 있다. 

 

 상하이는 장난(江南) 삼각주 지대로 토지가 비옥하고, 크고 작은 여러 수로가 시역에 종횡으로 뻗어 있다. 송나라 말기인 1267년에 이미 무역항이 되어, 무역감독관청으로서의 시박사(市舶司)의 분소(分所)가 설치되었다. 1842년에 아편전쟁의 결과 맺어진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구미제국과의 무역을 위한 개항장(開港場)이 되자, 상공업도시로서 급속히 발전하여 중국 제1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요즘 중국에서 일본에 대하여 역사 왜곡에 대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1932년과 1937년에도 벌써 두 차례나 이곳 상하이에서 무력충돌사건을 빚은 적이 있다. 이른바 상하이사변(上海事變)으로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대륙에 항일운동이 확대되어 1932년 1월 29일 조계(租界)를 경비하던 일본 해군육전대와 중국 제19로군(路軍)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서, 일본은 2월 중순에 3개 사단의 육군을 파병하여, 3월 중국군을 퇴각시켰다. 

 

 그러자 당사국과 상하이에 이해 관계를 가진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들이 정전 협의를 추진하였으나 조인 예정일인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의 폭탄사건이 일어나 일본의 파견군사령관이 사망함으로써, 협상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5월 5일 정전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이 만주국 건국 공작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일부러 도발한 책략이었다. 제2차 사변은 1937년 7월 화베이[華北]의 침공으로 인한 충돌이다. 8월 13일 일본군 육전대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으며, 이에 일본 육군이 파견됨으로써 전화는 중국 전토로 확대, 중일전쟁이라는 전면전의 계기가 되었다.

 


 

*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이라는 조그만 표지석과 내용을 새긴 바위  

 

 

▲ 아픈 역사의 기억, 루신공원(魯迅公園)

 

 중국 체류 마지막 날 아침 첫 행선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노신공원이었다. 전 이름은 홍구공원(虹口公園, 홍코우꽁위엔)이었는데, 중국 공산당이 집권 후 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친 '아Q정전'의 작자 루신(魯迅)의 묘와 기념관을 세우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기념관은 노신의 고향인 소흥성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기념관 안에는 작가의 필체가 담긴 원고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3년 전 한여름에 들렀을 때에는 잠자리만 무성하게 날아다니더니, 오늘은 노인들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 중에 눈에 띄는 노인은 길바닥에 글을 쓰고 있는 분이다. 특별히 제작한 빗자루 붓으로 먹물 대신 양동이의 물을 찍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길바닥에 일필휘지하고 있다. 다른 공원에서도 더러 보았는데, 여기서는 두 사람이 그러고 있길래 무슨 내용인가 보았더니, 두보(杜甫)의 시편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만 60세에 정년퇴직을 하여 자신의 여가 생활을 즐기는데, 기본 생활을 보장해주는 종신 연금 덕택이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맞벌이이기 때문에, 부부가 정년퇴임을 하면 매달 1인당 1∼2천 위안(한국 돈 13만원∼26만원) 정도의 연금이 지급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달 2∼3백 위안이면 식사비는 되고, 그 외 전기세, 수도세, 가스요금 등을 내고도 절약의 몸에 밴 노인들에게는 충분한 돈이 된단다.

 

 한국인에게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으로, 최근에 윤 의사의 항거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찾을 수도 없을 만큼 구석진 곳에 조그맣게 세워진 것이 아쉽긴 했지만 남의 나라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매정(梅亭)이란 이름의 집이 서 있어 다가가 본즉 올라가지는 못하게 되어 있어, 마침 의사의 지조를 상징하듯 피어있는 홍매화를 찍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유적지 사무실이 있는 건물

 

 

▲ 상해 임시정부 청사 방문

 

 다음에 찾은 곳은 마당로에 있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중국과 수교 바로 직전이어서 3층 건물은 매우 헐어있었고, 대여(貸與) 관계도 확실치 않은 때였다. 그래서, 우리는 대여와 수리 자금에 쓰라고 여행비에서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전달하고 간 기억이 난다. 이곳은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1층에서 몇 분 동안 이곳을 소개하는 비디오 시청을 한 후 골목길에 있는 3층 벽돌집으로 들어갔다. 전에 왔을 때 시커멓게 낡았던 외양은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이 손을 보아서 당시의 집기와 상황을 알리던 사진과 신문, 그리고 자료들을 게시해놓았고, 책도 제법 많이 모아져 있었다. 나오면서 이곳의 관리 유지비용을 일부 충당하기 위해 차려놓은 기념품 가게에서 간단한 것 몇 개 샀다.  

 

 좁은 길목에 위해 있기 때문에 차가 서있지 못하고 돌아오는 동안 기념 촬영을 하고 있자니, 우리나라 초등학교 학생들이 2대의 차에서 내린다. 알아보았더니, 중국에 진출한 CJ홈쇼핑이 한국복지재단과 공동으로 소년소녀 가장을 초청해 실시하는 문화 기행이었다. 삼일절을 기념으로 하고 있다는데, 작년 한글날에 이어 두 번째로 경상남도 거제와 통영시 도서지역에 거주하는 소년소녀 가장 20명을 초청했다고 한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서 일왕 투탄 의거에 이어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투탄 의거가 있은 뒤 9월에는 일제의 보복을 피하고자 임시정부를 상해에서 →항주 →가흥 →남경 →장사 →광주 →유주 →중경(重慶)으로 이동하는 수모를 겪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10월 25일에 장안파 공산당, 국민당, 한민당 공동성명으로 민족통일과 중경 임시정부 지지했고, 임시 정부 요원들은 11월 23일, 12월 1일, 12월 19일 등 3회에 걸쳐 귀국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 조차지의 흔적 외탄 거리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 자주 보이는 곳이 외탄(外灘)이다. 이는 이곳이 조차지(租借地)였기 때문에 서양의 많은 나라들이 당시에 지은 건물들이다. 조차지는 특별한 합의에 따라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일시적으로 빌려 준 일부분의 영토인데, 여기서 영토를 빌어 쓰는 나라를 조차국(租借國)이라 하고, 빌려 준 나라를 조대국(租貸國)이라고 한다. 

 

 조차지는 원래 제국주의 열강이 일정 기간, 이를테면 99년이라는 반영구적 기간에 배타적, 독점적인 정치적 지배를 설정한 토지이다. 조계(租界)와 함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외국의 행정구역이지만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조차지는 존재한다. 중국에서의 조차지는 청일전쟁 후인 1898년 자오저우만(膠州灣),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주룽반도(九龍半島), 웨이하이(威海), 광저우만(廣州灣) 등 5개 지역에서 일시에 나타났다.

 

 이러한 조차지는 조대국의 통치권을 전면적으로 배제하여 조차국이 배타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조차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1898년 독일이 중국으로부터 자오저우만을 99년간 조차하였고, 러시아가 뤼순항(旅順港), 다롄만(大連灣)을 25년, 프랑스가 광저우만(廣州灣)을 99년, 영국이 주룽반도를 99년, 러시아가 웨이하이를 뤼순항의 점거기간 동안 각각 중국으로부터 조차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후 러시아가 조차한 뤼순항과 다롄만은 러일전쟁 후 일본에 인계되어 조차 기간이 1997년까지 99년으로 연장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 반환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 상해가 개방된 이후 외탄 일대는 외국의 조계가 되어 열강의 각종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 1920년대에 이미 오늘날과 같은 고층 빌딩가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 건축물은 서양의 복고주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건물수, 집중도, 다양성 면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 불구(佛具)가 많은 예원상장 골동품 상점

 

 

▲ 예원상장에서의 쇼핑 

 

 예원(豫園)은 상해 중심구인 남시구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예원은 소주의 4대 공원인 졸정원, 사자림, 유원, 창랑정과 함께 '화동의 명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원래 명나라 때인 1559년부터 1577년에 걸쳐 관리를 지낸 반윤단(潘允端)이 그의 부친 반은(潘恩)을 위해 지은 대저택이다. 이 정원에는 10개의 연못과 30개의 누각이 있으며, 이들을 연결하는 좁은 복도와 오솔길을 따라가며 구경한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에 호응하여 진아림(陳阿林)이 이끄는 상해소도회(上海小刀會)가 구성되어 청조에 반기를 들었는데, 예원의 동북부에 있는 점춘당(点春堂)이 당시 반군의 거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약 100년 전에 예원의 일부가 팔렸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상해의 번화한 상가 가운데 하나인 예원상장(豫園商場)이다. 

 

 예원상장은 작고(小), 토속적이고(土), 특수하고(特), 많은(多) 상품으로 유명하다. 중국어로는 샤오츠(小吃)라고 부르는 스낵류를 파는 가게도 많다. 부근에는 낡은 건물 등 상해의 옛모습이 많이 남아 있으며 우리 나라의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 못지 않게 항상 붐비는 곳이다. 지난 번 왔을 때는 옥불사와 예원을 둘러보았는데, 옥불사(玉佛寺)에는 옥으로 만든 좌불(坐佛)과 와불(臥佛)이 있다.

 

 이것저것 사는 바람에 여행용 큰 가방이 하나 필요해서 사볼까 하고 돌아다니며 흥정을 해보니 재미있다. 여러 가지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주변 사람들이 도움으로 우리 돈 만오천원을 주고 싸게 샀다. 여기서는 롤렉스시계도 만원에 다섯 개를 살 수 있는데, 그 자리를 벗어나면 잘 가던 시계도 서버린다고 한다. 하나면 다섯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만두가 있다고 하여 찾았으나 못 찾고 말았다.   

 


 

* 점심 때 태가족의 민속춤

 

 

▲ 태가족 식당에서 점심 후 명주탑 관람

 

 점심은 태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그들의 민속춤을 보면서 먹었다. 비교적 키도 크고 예쁜 여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그렇게 독특하진 못했다. 음식도 입에 우리 나라 사람의 맞추었는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카운터 쪽에 술을 진열한 것이 보여 가보니, 1992년에 내가 중국에 입성하여 처음으로 마셨던 공부가주(孔府家酒)가 보여 한 병 사다가 마셨다. 산둥성 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명주다.

 

 식사를 끝내고 들른 곳은 외탄의 중심부인 동상이 서 있는 곳, 황포강 건너 명주탑이 환히 보이는 곳이었다. 거기서 기념촬영을 하고 찻집으로 갔다. 이곳에서 둘러앉아 설명을 들으며 차를 마셨다. 일엽차와 보이차도 많이 마셨다. 중국에서는 가는 곳마다 한번씩은 찻집에 들려야 하니, 짜증 나는 일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차 마시는 재미로 참고 견딘다. 장가계에서 건국다전이라는 1949년산 보이차를 샀는데, 이곳에는 보이차전이라는 1962년산을 팔고 있다.    

 

 1991년 7월 착공, 1994년 10월에 완성한 동방명주탑은 상해의 월스트리트라 할 수 있는 푸동 루쟈쭈웨이 금융구에 위치하고 있는 방송 수신탑이다. 높이가 468m로 아시아에서 첫번째,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다고 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둥근 구슬 모양이 두 곳에 박힌 모습이다.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는데 안개인지 황사인지 사방이 뿌옇게 되어 시원히 못 보는 것이 한이다. 

 

 중국의 펄 TV를 운영하는 미디어 그룹인 동방명주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이 탑은 263m 와 350m에 관광 전망대가 있으며 350m 전망대에는 귀빈실이 따로 있고, 일반 관광객들은 263m 전망대를 이용하게 되어있다. 동방명주탑 내부에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면 10초만에 전망대에 도착한다. 돌다가 금박을 입힌 닭을 사다가 놓아두면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제주시의회 김 의원이 말을 듣고 사진 못하고 사진만 찍었다.   
 

 

* 명주탑 기념품점에서 만난 금닭

 

 

▲ 개혁과 개방, 어디까지

 

 중국은 그들이 내세우는 이름대로 세계의 중심이며 넓은 나라다. 그리고, 자연 자원은 물론이요, 유적과 유물을 비롯하여 소수민족의 민속까지 관광자원이 무궁무진한 나라다. 다만 인구가 많고 사회주의 국가라는 핸디캡이 따를 뿐이다. 그러나, 개혁 개방 후 지금까지는 그들은 마음먹은 대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사회주의여서 아직까지는 통제하기 쉽고 정책의 혼란 없이 일방적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중국은 탄탄대로를 달릴 것인가? 그렇게 되면 옆에 있는 우리가 경쟁국이 되어 많은 어려움이 따르리라 본다.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가이드에게 마이크를 빌려 일행들에게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를 말하도록 하였다. 그 중에는 중국이 발전이 우리를 앞지를까봐 걱정하는 분들도 있고, 막무가내로 물건을 파는 것을 보며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는 분도 있었다.  

 

 2000년 1월 통계이긴 하지만 포동신구에 투자하고 있는 국가별 순위를 보면, 1위가 홍콩으로 31.98억불에 이르고, 미국, 독일, 일본, 싱가폴, 영국, 대만에 이어 한국은 8위다. 이렇게 상해는 세계 유수 기업이 앞다투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 거대한 기업전시장을 연상시킨다. 특히 투자 위험 부담이 적고 일반 소비자를 직접 공략할 수 있는 경공업 제품은 이미 세계 유명 브랜드와 중국 브랜드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제 중국은 해마다 경제 성장이 가속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외국의 투자를 환영하며 낮은 임금에 기술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장이 어디까지 갈지, 어디서 무슨 악재가 나와 멈추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무분별한 투자에다 일률적인 정책 노선, 경제 구조가 정상적이지 않는 점은 언제나 시한폭탄으로 남을 것이다. (끝)

 


 

* 명주탑에서 바라본 희뿌연 상해 시가

 

 

♬ 안녕 내사랑 - 등려군(鄧麗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