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일본의 관문 ; 화산섬 큐슈 답사기 (3)

김창집 2002. 10. 17. 13:52
▲ 대륙과의 통로였던 가라쓰항(唐津港)

지금부터 약 1,600년 전, 문화의 사절이었던 왕인(王仁) 박사 일행은 천자문과 논어 등을 싣고 전라남도 영암을 출발하여 이곳 가라쓰항에 닿았다. 그래서, 작년 4월 영암군에서는 왕인 박사 문화 축제를 기획, 이를 재현하고자 원시적인 떼배 '왕인박사호'를 띄우고 평균 시속 2노트로 보길도와 고흥 앞 해안을 거친 뒤 쓰시마(對馬島) 해안을 통과해 가라쓰 해안까지 약 3백㎞의 옛 발자취를 추적하며 일주일만에 무사히 도착한 적이 있다. 그렇게 옛날부터 교통 접점이었던 가라쓰시는 대륙으로부터 흘러오는 문명을 활발히 받아들여 죠몽·야요이 유적에서부터 중세의 성까지 여러 시대의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제주도의 서귀포시와 이곳 사가현의 가라쓰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공무원을 교환 근무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도 가까운 곳이다. 1939년 아시아를 경영할 야욕을 품은 일본의 철도청에서는 이곳에서 쓰시마를 경유해 거제도에 이르는 터널을 뚫어 일본과 유럽을 잇는 철도를 구상했던 적이 있다. 그 후 1983년에도 통일교회 창설자인 문선명 목사가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 하이웨이' 구상을 하고 '한-일 터널 연구회'를 설립했었고, 근래에도 심심치않게 도쿄와 런던을 철도로 연결하는 현대판 '실크로드' 건설 얘기가 오가는 곳이다. 이렇듯 가라쓰는 규슈의 북서부에 위치하여 한반도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대한해협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첫날 우리가 묵은 곳은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니지노마쯔바라(虹ノ松原)에 위치한 가라쓰 로얄 호텔이었다. 이곳은 마쓰우라가와(松浦川)의 하구로 바닷물이 유입되어 커다란 만을 이루기 때문에 긴 다리가 여러 개 놓여 있다. 2인1실의 방을 배정 받아 들어가 보니, 유카타라는 일본의 전통 옷이 곱게 개어져 있다. 호텔 안에서는 이것을 입고 돌아다녀도 된다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이 옷으로 갈아입고 일본 사람 같다는 등 농담을 하며, 저녁 식사인 전통 일식을 먹기 위해 식당에 모였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8년 동안 가이드 생활을 했다는 유한숙 씨의 안내를 받아 일본식 식사 예절을 배우며 식사를 한다. 이곳이 어촌이어서 해산물 중심의 음식은 대부분 우리 입맛에 맞았다. 생선회, 초밥, 굴과 소라, 김, 계란찜, 연어훈제, 오리탕, 된장국 등이 주 메뉴다. 그런데 한국 일식집은 상에 올려놓고 여럿이 집어먹는 겸상인 반면 여기는 작은 식기에 조금씩 덜어놓은 독상이다.

저녁을 끝낸 일행은 피곤한지 대부분 온천탕으로 갔지만, 나는 먹은 것도 소화시킬 겸 미리 약속된 몇 사람을 데리고 시내로 향하였다. 기인 다리를 지나 시내로 들어갔으나 벌써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져 있었고, 거리는 우리 나라처럼 그리 밝지 않다. 시가지가 해변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길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살폈는데, 대부분의 상점이나 업소는 불이 꺼져 쓸쓸하였다. 술집이나 가라오케를 찾았으나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불이 켜져 있는 슈퍼로 들어가 맥주와 음료 그리고 마른안주를 사고 돌아오다 긴 다리 중간에 동그랗게 만들어 놓은 쉼터에 앉아 한 잔 하고 들어왔다. 호텔 방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온천욕을 하고 나오는데, 술자리를 벌여 놓은 방에서 초청이 있어 오늘 경험한 일들을 안주 삼아 담소하며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가라쓰시에서 볼만한 것들

아침에 눈을 뜬것은 5시 반이었다. TV를 켜고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스포츠 뉴스가 진행 되는 곳이 있었다. 먼저 프로 야구 전적이 나오고 다음은 아시안 게임에서 자기네 선수가 금메달을 딴 내용을 방송한다. 주로 유도 종목이었는데 하필이면 지는 쪽은 모두 우리 나라 선수여서 아침부터 개운치 못하다. 마침 동료가 깨어 서둘러 아침 산책을 나갔다. 이곳 로얄 호텔은 전국에 28개의 체인점을 갖고 있었고, 골프장과 골프연습장 몇 개와 여러 가지 관련 시설을 갖추었다. 얼마 안 가서 송림(松林)과 해수욕장이 나타났는데, 가라쓰 만을 끼고 마쓰우라가와 하구 동쪽으로 뻗어 있는 폭 400∼1000m, 길이 약 5km에 이르는 넓은 소나무 벌판을 끼고 있는 해수욕장이다. 17세기초부터 방풍림으로 심은 나무가 지금은 약 100만 그루로 늘어나 무성한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모래 위를 걷다가 눈에 익은 조개껍질이 있어 기념으로 줍는데, 해가 둥실 떠오른다. 카메라를 못 가져온 것을 아쉬워하며 방향을 제대로 잡고 서쪽 우리 제주도가 있는 위치를 확인하였다. 이곳은 위도상으로 제주도와 비슷한 위치에 놓여 있다. 소나무 숲으로 가다 보니, 철늦은 아기달맞이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고, 표지판에는 갯메꽃 군락지 천연기념물 사진이 붙었으나 정작 갯메꽃은 자취도 안 보인다. 소나무 숲 사이사이에 괴상하게 오그라진 채로 자란 소나무가 독특하다. 국유림을 가라쓰시에서 대여하여 휴양림으로 쓰고 있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기념 식수로 작은 소나무 여섯 그루를 심어 놓은 것이 보인다.

아침을 뷔페식으로 마치고 호텔 직원들이 도열해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정성스런 환송을 받으며 다리를 지나 시내로 들어간다. 멀리 가라쓰성이 보인다. 1608년에 완성된 이 성은 가라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마이즈루성(舞鶴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법 흥성했던 이 성은 19세기 중엽 메이지유신 이후 폐성으로 변하여 현재는 온천으로 조성되었고 벚나무와 등나무의 명소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전시 공간으로 개조되어 각 층에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물과 미술품들이 전시돼 있는데, 성 꼭대기 천수각(天守閣) 전망대에 오르면 멋있는 가라쓰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이즈루 공원은 가라쓰성을 감싸며 사방 1km에 걸쳐 펼쳐져 있고, 공원 안에는 커다란 등나무를 비롯하여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진다. 가라쓰 성이 자리잡고 있는 마이즈루 공원에서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는 해안선과 니시노하마 해수욕장을 오른편에 두고 돌담 산책로를 따라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시간을 알리는 북'이 있다. 기타조나이(北城內)에 있는 시간을 알리는 북은 가라쓰성 공원의 종루로 시간이 되면 무사 인형이 나타나 북을 두드려 시간을 알린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돌담길 산책로를 계속 따라가면 기와무라 미술관으로 나가는 샛길이 있다. 미술관을 지나 큰길로 나오면 가라쓰 신사와 히키야마 전시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니시조나이(西城內) 가라쓰 신사 옆에 위치하고 있는 히키야먀 전시장은 가라쓰의 가을을 채색하는 '가라쓰쿤치' 축제의 주역인 14대의 히키야마를 전시하고 있다. 사자, 용, 도미 등 여러 가지 모양을 한 삿갓을 4개의 바퀴가 달린 받침대에 실은 '히카야마'는 총 14대로 가을 축제 때 거리를 누비는 명물이다. 가라쓰 쿤치 행사는 가라쓰시의 연중 행사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1월 2일부터 4일까지 행하여진다. 17세기초부터 계속되고 있는 이 행사는 일본의 중요 민속무형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다. 피리, 북 등의 반주에 맞춰 중량 5톤 이상의 히키야먀가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라는데, 때를 맞춰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 조선 도공들의 한이 서린 아리타(有田)

아침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도자기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리타로 향했다. 임진왜란까지만 해도 일본의 도자기 수준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들은 자기를 수중에 넣다 못해 이를 직접 만들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 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때 이미 백자가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일본으로 잡혀온 조선 도공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찾아내었다. 그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삼평(李參平)이 흙을 발견했던 자리 입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멀리 흙을 채취했던 굴이 보였다. 이를 사용해 대대로 좋은 자기를 빚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도조(陶祖)로 추앙 받고 있다.

일본의 자기는 청자, 백자, 청화백자 등이 있는데 초기에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17세기 중반부터 명나라 말기의 적회식(赤繪式) 자기 제조 방법을 배워 직물 무늬에서 따온 회화적인 무늬가 나타났다. 그래서, 아리타 도자기는 전 일본에 퍼지게 되었고 해외에서도 호평 받아 17세기 후반, 즉 1659년에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18세기가 되자 독일의 마이센 도요지를 시작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 도요지에서 아리타 도기를 모방한 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도자기의 고장답게 관광지의 안내판들이 모두 타일 같은 자기로 만들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사가(佐賀)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1598년
'일본의 보물'로 잡혀온 이삼평
18년간 도자기 굽기를 거절하다
아리타 고을에 정착하여
1616년 뎅구다니(天狗谷)에 가마를 설치하고
한 맺힌 흙덩이를 부수고 이겨가며
고향에 두고 온 꿈속의 얼굴들을
가마 속 뜨겁게 불지피던 이삼평
370여 년 이어온 조선 도공들의 혼이
죽어서 살아 있는 애절한 이 마을
지수가마(磁州窯) 주차장에 내려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자기를 구경한다
방방곡곡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흙을 빚어 구워내는 이치를 배우는
600석 규모의 실습실도 있어서
손수 만든 도자기에 이름을 써넣으며
이런 게 행복인가 행복해 하는구나
해마다 4월말 5월 초순 1주일간
하늘 높이 빛나는 도자기 축제가 열리면
아리타역에서 카미아리타까지 4km 거리에
150여 가마모토(窯元)와 250여 상점이
동양 서양 인파들과 거리를 꽃 피우며
더러는 기뻐하고 더러는 감탄하며
'도조 이삼평(陶祖 李參平)'을 흠숭하는 고장
세월은 가도 불씨는 남아
불꽃 벙그는 뜨거운 가슴마다
하나 둘 피어나는 흙의 혼
저무는 겨울 하늘 노을이 아름답구나

--- 조신호 『사람들 4 - 아리타, 지슈가마(磁州窯)』전문


우리는 이곳의 도자기를 두루 섭렵하기 위하여 도자기박물관으로 갔으나 월요일도 아닌데 무슨 이유인지 휴관 중이었다. 그래도 도자기의 본 고장에서 왔다고 어떻게 안 될까 하여 교섭하였으나 막무가내다. 박물관 주변은 숲이 우거지고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차를 타고 주차장을 나서려는데 승용차 한 대가 길을 막고 있어 대형 차량인 우리 차가 나올 수가 없다. 어떻게 일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개탄하며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승용차들을 바라보니 여러 회사에서 나온 차들이 구구각색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비교적 몸집이 작은 차들이 많다. 앞에만 둘이 타는 풍뎅이 같은 승용차가 너무 깜찍하여 막간을 이용, 옆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이래저래 시간을 허비해버린 탓에 카미아리타(上有田)의 이삼평의 묘와 기념비가 있는 곳에도 가지 못하고, 대신 현대 도자기를 모아 파는 도자기 조합의 판매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각 도요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전시해 놓고 파는 점포 10여 개가 두 줄로 쭉 늘어서 있다. 대부분 일본 도자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무늬가 요란스런 것들이다. 게 중에는 이름난 분의 작품으로 수천만 엔을 호가하는 것으로부터 500엔 짜리 찻잔까지 다양하다. 가게마다 값이 차이가 나서 이곳저곳 싼 것을 찾아 기념이 될 만한 소품을 두어 개 샀다. 아리타 도자기와 유럽의 명품 도자기 등 세계 각국의 도자기 문화와 역사를 한 곳에 모아 놓은 도자기 테마공원에도 못 가고, 시기가 맞지 않아 해마다 열리는 도자기 축제도 참가하지 못하는 대신 그곳에서 비싼 도자기를 만져보며 구경은 실컷 한 셈이다. [10월 3일 오후∼4일 오전]


<사진> 위는 일본 아리타 도자기의 할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이삼평의 기념비, 가운데는 도자기 점포에서 팔고 있는 다기의 하나로 72,900엔의 가격표가 붙음, 아래는 멀리서 바라본 가라쓰성 주변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