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2023/05 30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은 산호초 기억 같은'(5)

♧ 빈손 작대기로 탁탁탁 털어내는 어머니 쭉정이 이리저리 흩어지던 시간 앞에 손안에 참깨 뭇들도 기꺼이 함께 했네 곰방메 섭골갱이 소라 보말 날미역 뜨인 눈 한 순간도 손을 놓지 않았네 어느 날 다 놓아두고 저 건너에 간 빈손 ♧ 용수리 소고 단발머리 소녀가 넓미역을 따던 곳 그 건너 성창동네 긴 머리 땋은 숙자 캄캄한 콘크리트 속으로 하나둘 묻혀가네 절부암 열녀마을 굽이돌아 저 차귀도 용마저 떠날 것 같은 한숨을 푹푹 쉬고 찔레꽃 눈물 날리는 아버지의 당산봉 용수포구 접한 땅 급매물로 팝니다 힐긋힐긋 눈치 보는 감정가와 낙찰가 어쩌나, 내 소녀의 눈 용수리가 팔려가네 ♧ 제주해녀․11 한평생 항해라야 발동선 하나였네 자나미* 뒤로 하고 물 말아 밥 한 숟갈 난바르 뱃길 물결은 해녀노래 추임새 상군해녀 ..

문학의 향기 2023.05.31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5)

♧ 호박 중심 – 이향지 단맛에 끌려 앉혔으니 호박이 우리 밥상의 중심이었다 흐린 아침이면 더 밝은 등을 켜던 호박꽃 호박 하나 따다 줄래 따낸 구덩이에 잔반을 묻어주던 어머니 따다 드리면 너무 작다 퇴짜 맞고 다시 따온 호박에는 씨가 쪼로로 박혀 호박은 내 이명의 태초 호박 하나 따다 줄래 싫을수록 더 멀리로 달아나던 귀 골짜기가 많아, 골짜기가 많아, 흔들어 보면 호박씨 메아리 더 세게 흔들면 엄마의 잔소리 넝쿨 호박을 먹고 호박에게도 먹이며 길고 무더운 계절을 붙잡고 넘었다 어떤 호박이나 떡잎 두 장으로 시작하지만 장독대 옆 호박은 불같아 먼저 흙이 되고 밭두렁 누렁탱이는 서리 때까지 버텨 보약이 되었다 단맛에 끌러서 모였으니 우리 밥상의 중심은 바뀔 줄을 몰랐다 ♧ 기린 – 장문석 기린은 아주 잠..

문학의 향기 2023.05.30

서귀포시 붉은오름자연휴양림 상잣성길(1)

□ 붉은오름 자연휴양림 자연휴양림이 자리한 붉은오름은 표선면 가시리 산158번지로 남조로변에 있는 표고 569m, 둘레 3040m의 오름이다. 오름 자체는 휴양림 밖에 있으나 건강산책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오름 북쪽 길가에 통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바탕에 멋진 글씨체로 써 붙인 안내판을 지나 진입로에 들어서면 왼쪽에 붉은병꽃나무, 오른쪽에 참꽃나무가 꽃을 피워 탐방객을 맞는다. 약 300m쯤 걸어간 곳에 주차장과 방문자센터가 자리 잡았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은 한라산 동쪽 제주시와 서귀포의 경계선 남쪽에 자리해 있다. 그래서 온대․난대․한대 수종이 다양하게 분포된 울창한 삼나무림과 해송림, 천연림 등의 자연경관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이다. 휴양림에는 ‘숲속의 집’과 각종 편의시설, 그리고 쾌적한 쉼터를..

길 이야기 2023.05.29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3)

♧ 부활절 아침 – 양시연 그냥 가도 좋으련 아주 가도 좋으련 섬 건너 오름 건너 담장 건너 마당까지 온 세상 메아리 돌 듯 돌고 도는 돌림병 내 남편은 어디서 어떻게 걸렸을까 세상에 반항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나, 전단지 받아들 듯 아침저녁 겸상하고 숟가락 바꿔 봐도 스스로 네 인간성 네가 알 거라는 듯 내게는 구원의 손길 내밀지를 않는다 ♧ 홀어멍 국수집 - 김미영 누구나 그렇게들 살아낸다 하지만 변소 표 공동수도 걸쭉한 욕 한 바가지 국수 맛 소문난 그 집 서문시장 한 귀퉁이 홀어멍집, 화투패도 딱 맞아떨어진 날 족발에 쌀막걸리 흥얼흥얼 탑동바다 그때쯤 어느 단골의 수작질도 보인다 하굣길 삼삼오오 재잘재잘 단발머리들 슬쩍 기운 사내 어깨, “아빠 온댄 전화 왔어요” 새초롬 말 ..

문학의 향기 2023.05.28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은 산호초 기억 같은'(4)

♧ 주파수 내 방엔 매일 듣는 라디오 있습니다 밤 열시만 넘으면 어김없이 노크하는 몸 낮춘 세상 소요를 꿈결에서 듣지요 정해진 채널 외엔 관심이 없습니다 절로 절로 드나드는 놓아버린 마음처럼 늦도록 흔들림 없이 다가오는 주파수 주파수 그 건너에 슬픔이 있습니다 아련한 내 잠결 속 눈물이 스며들어 날마다 무명 베갯잇 얼룩져 있습니다 ♧ 생각의 차이 만 원을 훌쩍 넘기는 점심 한 끼 먹는 사람 만 원쯤에 팔리는 시집을 보고 나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 아깝다고 말하네 무슨 말 늘어놓는지 시인만 중얼중얼 만 원 한 장 아깝겠네 초라한 시집 한 권 요즈음 입맛 돋우는 먹는 것만 하랴만 사람아, 사서 먹는 바닐라 라떼 한 잔 한 끼만 배 부르는 포만감을 주지만 나 때는 시집 한 권이 인생울 바꿨다네 ♧ 스마트폰 스마..

문학의 향기 2023.05.27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3)

♧ 먼 동네에서 이발하고 싶은 날 - 강덕환 뜬금없어도 좋다 고맙게 잘 받았다고만 하고 이러저러 꽂아 둔 시집 하나 챙겨 들고 환승하면 되지 뭐, 굳이 노선버스 익히지 못해도 방향만 맞으면 버스를 탄다 창가 쪽이면 덜컹거리는 맨 뒤 좌석이어도 좋다 햇빛이 들면 읽던 시집으로 가리고 졸린 눈은 차창으로 스미는 바람결에 맡겨줘도 좋다 언뜻 키 큰 정자나무, 그 옆 빙빙 도는 빨파흰 이발소 표시등이 보이걸랑 허둥대며 하차 벨을 누르자 선뜻 들어서 단골일 것 같은 유리문 힘주어 열면 훅, 포마드 냄새 와락 안기던 낮은 지붕 삼거리 이발소에서 하루를 몽땅 저당 잡혀도 좋겠다 먼 동네까지 와서야 비로소 늘어난 새치가 낭자하게 보이걸랑 예상치 않았던 염색이나 해볼까 아차! 카드기가 없지 현금이 없어도 외상이 통할까 ..

문학의 향기 2023.05.26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4)

♧ 감포 종점 - 박숙경 추령재를 지나면서부터 더 설레었네 포구에 닿으면 온 바다가 내 것인 양 들뜬 기분으로 읍내를 통과해야 하네 문득, 예리한 시선에 포착된 감포 종점 밤이 깊어야 했지만 분명 한낮이었고 나도 모르게 마포 종점이 입술을 빠져나왔네 있을 리 만무한 갈 곳 없는 밤 전차를 호출하는 사이 갈 곳 바쁜 자동차들은 녹슨 간판이 걸린 다방 거리를 지나가네 불행하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오가는 사람들 눈빛에 담긴 무수한 기다림도 읽지 못했네 차들은 수평선 쪽으로 자꾸 달아나네 내가 이다음 지나가는 사람이 될 때 궂은비 정도는 내려주겠지 포구 맞은편 그야말로 옛날식 항구 다방 구석진 자리 물 날린 비로드 의자 위에 쓸데없이 명랑해지는 엉덩이를 주저앉히고 퀴퀴한 냄새 따윈 모른 체하며 늙은 마담의 주..

문학의 향기 2023.05.25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2)

♧ 적당한 핑계 - 양시연 용수리는 내 고향 떠나는 땅이었다 저마다 수평선을 안 넘으면 안 되는 듯 가서는 그저 그렇게 돌아오질 않았다 얼굴이며 이름마저 가뭇가뭇 잊힐 무렵 적당한 핑계를 대며 친구들이 돌아온다 반세기 거슬러 와서 동창회가 열리다니! 그래, 용수리는 돌아오는 땅이다 그 옛날 도 괜히 여기 흘러왔을까 반도에 첫 미사 드린, 돌아와야 하는 땅이다 ♧ 섬 잔디 지듯 - 김미영 아침에 문안 인사 저녁에 소쩍소쩍 소쩍소쩍 소쩍소쩍 그 소리 되돌아와 황사평 섬 잔디 지듯 그렇게 소쩍소쩍 가야호 삼등칸에 실어놓은 연륙의 꿈 어쩌다 사라봉 기슭 둥지를 틀어놓고 백구두 날 선 백바지 한량 같은 내 아버지 반세기 세월 따라 영평동 끝자락에 순리이듯 반역이듯 그렇게 나란히 묻혀 그 옛날 순댓국 냄새 소쩍소쩍..

문학의 향기 2023.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