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353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의 시(4)와 설경

♧ 침묵 침묵은 노래를 기다리는 현絃이다 기다린다는 말은 맹목적 수동 행위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 안에 붙은 불길을 다스리며 지긋이 기다리는 기다림도 있다 무르익은 무화가 열매 붉은 속살이 입안에서 터지는 순간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침묵은 그렇게 참 오래 기다려서 불꽃처럼 황홀한 노래가 되기도 한다 ♧ 파경 -말, 말, 말, 또는 독설毒舌 가로로 쩍, 금 간 거울의 입에서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흰 거품처럼 마구 튀어나왔다 허공에 어지럽게 난사되었다 누군가는 크게 상처 입었을 것이다 저 뒷감당을 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 와불臥佛의 눈* 실크로드 병령사 석굴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손바닥으로 한쪽 얼굴을 떠받치고 옆으로 길게 누어 묵상에 잠겨있던 와불臥佛이, 속속들이 너를 들여다보겠다며 시시티..

아름다운 세상 2021.01.09

'산림문학' 2020 겨울호의 시

♧ 은적암 오르는 길 - 김귀녀 설 명절 끝나고 남편과 함께 은적암 오른다 갈잎을 밟으며 우뚝 서 있는 갈참나무 숲길을 간다 봄을 기다리는 새순의 이불이 되리라 침묵의 언어로 들려주는 나무들의 바람소리 들린다 쏴 쏴 바람소리 무성한 침묵의 언어 겨울나무가 들려주는 바람소리 들으며 살던 때가 있었지 그 시절 우리 집 가훈은 제자리였다 아이들은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이제 우리 집 가훈은 겨울나무다 남은 세월 나그네 길 무거운 침묵으로 걸어가리라 맑은 가난도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 동짓날 밤이 오면 - 김내식 호롱불 심지 끝에 하늘하늘 타는 불꽃 문종일 바늘구멍으로 들어 온 황소바람에 흔들리고 아랫목은 아이들 차지 청솔가지 매운 연기에 눈물 짖는 어머니 퍼석한 아이들 주둥이 떠올리며 새알 내알, 보글보글 팥..

아름다운 세상 2021.01.08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의 시(3)

♧ 흰 눈 편지 흰 눈 위에 새 한 마리 총총 다녀가셨다 가느다랗고 앙증맞은 발자국을 새기고 가셨다 빼어난 곡선으로 멋들어지게 휘돌고 가셨다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쓰고 가셨다 밤새 눈 내리다 멈춘 이 하얀 아침 같이 맑게 돋아나는 해를 맞이하려다 시간에 쫓겨 그냥 돌아간 것은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해 보는 집 가까운 그 공원 길 나도 거기 몇 줄 종종걸음을 남기고 왔다 내일이나 모레나 아무 날 때쯤 다시 눈 오는 날 때맞춰 우리 함께 하얗게 씻긴 새아침을 맞이합시다그려, 하고 ♧ 제주 잠녀 바다 한복판에 피어나는 꽃, 저 꽃이 아름답다 뼈마디 바늘로 쑤시듯 아파도 해삼 전복 캐러 간다 오늘도 거친 물속 테왁에 몸 기대고 호오이호오이 토해 내는 힘겹고도 애잔한 숨비소리 내 어머니도 해녀였다 해녀 아닌 여인..

아름다운 세상 2021.01.0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해의 어두움을 거둬내고 저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은 날이 많기를 기대해 봅니다. 지난 한 해 우리를 옭아매었던 코로나19로부터 빨리 벗어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건강이 왜 소중한 것인지 왜 지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왜 세상은 혼자만 살 수 없는지를 깨닫게 하소서. 시간 날 때마다 찾아주시는 여러분들께 새해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새해의 소망 - 최영희 올해도 많이 사랑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픔이 없는 세상 거짓말이 없는 세상 작은 풀잎 하나라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 꿈으로 가득한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새싹, 어린 천사들이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추위에 떠는 우리 가난한 이웃이 모두, 모두 꿈을 가지..

아름다운 세상 2021.01.01

다사다난했던 2020년을 보내면서

♧ 한해 마무리하는 기도 - 은파 오애숙 저무는 올 한해 회도라 따뜻한 감사로 보내게 하사 오는 새해 뜻 있게 맞이하게 하소서 다사다난 했던 올해 저무는 한 해 끝자락 해거름 뒤 칠흑의 어둠 잠시 안식 케 하시고 밝고 찬란한 새해 위해 동녘의 금빛 찬란한 햇살 펼쳐 마음속의 어둠 뜷고서 사뿐히 오소서 밝아오는 새해 금빛 햇살 가슴에 안고 사랑의 온도 높여 서로 위한 아름다운 사회 이루게 하소서 소외와 절망 있는 곳에 금빛 사랑 넘쳐 오색 무지개빛 희망과 기쁨으로 웃음꽃 피게 하소서 코로나 팬데믹 종식되어 희망속에 새로운 계획 품은 날개 예전의 활기찬 세상 만들어 주시고 서로 만나는 사람마다 지성으로 격려와 사랑속에서 긍정의 말로 축복하는 자 되게 하소서 ♧ 경자년(庚子年)을 보내면서 - 소산 문재학 코로..

아름다운 세상 2020.12.31

양대영 시평집 '탐나 국시'에서

♧ 게와 아이들 - 정군칠 게들은 어쩌자고 밀물을 따라와선 바지락바지락 서귀포를 끌고 가나 바다는 어쩌자고 게들을 몰고 와선 한 양푼이 푸우 거품을 쏟아놓나 어쩌자고 나는 또 자꾸만 헛딛는 어린 게의 집게발에 목이 메어 은종소리 쟁쟁거리는 그늘로 스며들고 있나 -그림이 시고 시가 그림이다. 그림의 어원이 ‘그리워 그리다’라고도 하던데 생전 꼿꼿했던 정군칠 시인이 그립다. 어쩌자고 나는 또 그림 속 서귀포 바닷가를 걷는가. 발끝이 은종소리로 젖는다. [글 양대영 시인] ♧ 오래된 돌담 - 황금녀 밭담길을 걷다가 오래된 돌담에 손을 얹었다 여든의 내 손등 같다 바람 막아내느라 고생했다 고생했다 서로를 위로하고 가만히 쓰다듬는 저녁답 -제주의 모진 바람을 막아주려 쌓은 밭담길을 걷는다. 돌로 쌓은 밭담으로 바..

아름다운 세상 2020.12.29

이웃을 돌아보는 성탄절

올 느닷없는 코로나 정국에도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 크리스마스이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무언가 이룬 것 같은데 허전한 느낌만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욕심(慾心), 자신의 욕심만 생각하고 주위 또는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욕심’이란 괴물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어 만족할 줄 모르고, 그것이 이루어지 않을 때는 염치고 뭐고 없이 덤비며 안 되면 주변 탓, 나라 탓만 하게 됩니다. 오늘 같은 날은 가진 사람들이 주위를 돌아보며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임을 느끼고 주변에 못 먹고 못 입어 추위에 떨고 있지나 않는지 살펴 움켜쥔 손을 활짝 펼 때입니다. 생각해 보면 나 혼자만 잘해서 부(富)를 축적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또는 이..

아름다운 세상 2020.12.24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의 시(2)

♧ 버스는 간다 버스는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간다 기다리지 않아도 간다 단 몇 초의 만남일지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주저앉는 순간 그것은 버스가 아니므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어딘가로 가는 나도 포기하는 순간 나를 잃어버릴 것이므로 간다, 스스로 차를 굴리지 못하는 빈손들에게로 어느 불빛 아롱아롱 외로운 버스 정류소 한겨울 으스스 떨며 시린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에게로 아무리 무릎관절 삐걱거리고 몸 쑤셔도 그들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주기 위해 그들이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나룻배처럼 수도승처럼 묵묵히 버스는 간다 버스에게는 아픔이 기쁨이다 아 내가 한동안 연락두절이었을 때 주소 달랑 들고 얼음장 같은 방 허위허위 찾아온 그 옛날의 아버지처럼, 노여운 얼굴에 감춰진 물속 깊은 사랑처럼..

아름다운 세상 202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