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제주상사화 9월에

김창집 2011. 9. 1. 00:56

 

며칠 비가 오고 선선하더니, 9월이다.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처럼 시간이 빨리 흐른 적이 없다.

달력을 떼어내고 나서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한 달이 흘러버린다.

하기야 8월에도 좀 돌아다녔는가? 울릉도 독도에다

안동 하회마을로 주왕산으로 경주 양동마을로….

다만 바삐 사는 관계로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라

해두자. 어제 시간을 내어 한라수목원에 갔더니

이 꽃 개상사화가 지고 있었다.

 

제주상사화(相思花)는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비늘줄기는 둥글고 잎은 뭉쳐나며 7~8월에 노란 꽃이

꽃줄기 끝에 5~10송이 핀다.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꽃꽂이에 널리 쓴다. 제주상사화는 전에 개상사화로

불리었는데, 그와는 다른 제주특산임으로 제주상사화로

명명되었다.

 

  

 

 

 

♧ 개상사화 - 양전형

 

내가 피었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마세요

그 사람이 알면

나 다시 꺾이리니

그 사람 앞에서는 얼른

나를 오므릴 수 없어요

이렇게 활짝

내 맘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이 꺾어도

내 몸 선뜻 내 줄 수밖에 없어요

제발,

이 풀숲에 숨긴 사모

내가 이렇게 피었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마세요

  

 

♧ 상사화(想思花) - 박정순

 

어떤 천형의 죄를 지었기로서니

피었다 지는 순간까지

옷깃한번 스칠 수 없고

눈빛 한번 맞출 수 없는

운명의

너를 이름하여

누가 상사화(想思花)라 불렀는가

 

이른 봄 피어난 잎사귀가

형태도 없이 폭삭 삭은

그 자리에서

한여름 연보랏빛 얼굴

살며시 내밀다

울컥 솟은 그리움에

목만 길어진 연둣빛 꽃대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한

이승, 아닌 저승에서조차

서로를 그리워하다 지는

업보의 꽃

누가 상사화(想思花)라 이름 지었는가

 

  

 

♧ 상사화의 전설 1 - 배은미

 

 

여린 듯 보이는 너를

꺾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러운 너를

그래도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라도 살아있는 네가

안쓰러웠지만

사실은 부러웠다

평생 단 한사람만을 기다리는 네가

무서웠다

사랑한다고 아무리 소란스레 굴어도

네 사랑에 비하면

나는

사랑이라 말했던 모든 걸 부정해야 하니까

 

  

 

♧ 상사화 - 목필균

 

이 가을

그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마세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곱다고 쓰다듬지 마세요

 

그 손길은

늘 기다리게 하는

눈물이 되니까요

 

동백꽃 처연히 진

이른 봄부터

흙발로 정진해온

선운사 목탁소리

붉게 여물어가는 데

 

한 뿌리에서 태어나도

만나지 못하는 그대와 나

차라리 절망을 익히게

해 주세요

   

  

 

 

♧ 상사화(2) - 유일하

 

가루 비 내려와 속눈썹 그윽하게

사무치는 사랑의 눈물 맺혔어라

자늑자늑하게 함치르르한 네 모습

사뭇 허공만 바라보며 떨고 있구나

 

맺지 못할 인연이라면 태어나지나 말지

긴 꽃대 아삼삼하게 빛 너울 서렸어라

푸른 지대 이끼 비집고 옹기종기모여

산사 풍경소리 머금어 길마중 가누나

 

계곡물 바야흐로 낙엽 한 장 띄워

고이적은 깨알편지 실리어 가려무나

임에게 나의소식 전할 즈음 내 모습은

찬 서리에 메말라 대롱만 잡고 있네.

 

말없이 오고 소리 없이 가는 인생길

맑은 공기 맑은 물 너마저 없었던들

내 어찌 산속에서 외로이 떨었겠냐마는

임 향한 곧은 기개 안에서 삭이고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