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상사화 9월에
며칠 비가 오고 선선하더니, 9월이다.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처럼 시간이 빨리 흐른 적이 없다.
달력을 떼어내고 나서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한 달이 흘러버린다.
하기야 8월에도 좀 돌아다녔는가? 울릉도 독도에다
안동 하회마을로 주왕산으로 경주 양동마을로….
다만 바삐 사는 관계로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라
해두자. 어제 시간을 내어 한라수목원에 갔더니
이 꽃 개상사화가 지고 있었다.
제주상사화(相思花)는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비늘줄기는 둥글고 잎은 뭉쳐나며 7~8월에 노란 꽃이
꽃줄기 끝에 5~10송이 핀다.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꽃꽂이에 널리 쓴다. 제주상사화는 전에 개상사화로
불리었는데, 그와는 다른 제주특산임으로 제주상사화로
명명되었다.
♧ 개상사화 - 양전형
내가 피었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마세요
그 사람이 알면
나 다시 꺾이리니
그 사람 앞에서는 얼른
나를 오므릴 수 없어요
이렇게 활짝
내 맘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이 꺾어도
내 몸 선뜻 내 줄 수밖에 없어요
제발,
이 풀숲에 숨긴 사모
내가 이렇게 피었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마세요
♧ 상사화(想思花) - 박정순
어떤 천형의 죄를 지었기로서니
피었다 지는 순간까지
옷깃한번 스칠 수 없고
눈빛 한번 맞출 수 없는
운명의
너를 이름하여
누가 상사화(想思花)라 불렀는가
이른 봄 피어난 잎사귀가
형태도 없이 폭삭 삭은
그 자리에서
한여름 연보랏빛 얼굴
살며시 내밀다
울컥 솟은 그리움에
목만 길어진 연둣빛 꽃대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한
이승, 아닌 저승에서조차
서로를 그리워하다 지는
업보의 꽃
누가 상사화(想思花)라 이름 지었는가
♧ 상사화의 전설 1 - 배은미
여린 듯 보이는 너를
꺾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러운 너를
그래도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라도 살아있는 네가
안쓰러웠지만
사실은 부러웠다
평생 단 한사람만을 기다리는 네가
무서웠다
사랑한다고 아무리 소란스레 굴어도
네 사랑에 비하면
나는
사랑이라 말했던 모든 걸 부정해야 하니까
♧ 상사화 - 목필균
이 가을
그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마세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곱다고 쓰다듬지 마세요
그 손길은
늘 기다리게 하는
눈물이 되니까요
동백꽃 처연히 진
이른 봄부터
흙발로 정진해온
선운사 목탁소리
붉게 여물어가는 데
한 뿌리에서 태어나도
만나지 못하는 그대와 나
차라리 절망을 익히게
해 주세요
♧ 상사화(2) - 유일하
가루 비 내려와 속눈썹 그윽하게
사무치는 사랑의 눈물 맺혔어라
자늑자늑하게 함치르르한 네 모습
사뭇 허공만 바라보며 떨고 있구나
맺지 못할 인연이라면 태어나지나 말지
긴 꽃대 아삼삼하게 빛 너울 서렸어라
푸른 지대 이끼 비집고 옹기종기모여
산사 풍경소리 머금어 길마중 가누나
계곡물 바야흐로 낙엽 한 장 띄워
고이적은 깨알편지 실리어 가려무나
임에게 나의소식 전할 즈음 내 모습은
찬 서리에 메말라 대롱만 잡고 있네.
말없이 오고 소리 없이 가는 인생길
맑은 공기 맑은 물 너마저 없었던들
내 어찌 산속에서 외로이 떨었겠냐마는
임 향한 곧은 기개 안에서 삭이고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