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에 보내는 흰진범
계절은 시작이 어렵지 언제 변하나 싶게 착착
진행된다. 8월 23일 처서가 되어 더위가 물러나더니,
9월이 들었는가 했더니, 다시 흰이슬 내리는 백로다.
백로(白露)는 들녘의 농작물에 흰 이슬이 맺히고 가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때로, 고추는 더욱 붉은 색을
띠기 시작한다. 맑은 날이 연이어지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날이 된다.
흰진범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키는 80㎝ 정도로 자라고, 검은색의 굵은 뿌리
줄기를 땅속 깊이 내린다. 5~7갈래로 갈라진 잎은
갈라진 조각의 가장자리에 끝이 뾰족한 톱니들이 있다.
연한 자주색의 조금 섞인 흰꽃은 8월경 줄기 끝이나
잎겨드랑이에 달리는 총상(總狀)꽃차례에 2~3송이씩
무리지어 핀다. 투구처럼 생긴 꽃은 5장의 꽃받침잎이
마치 꽃잎처럼 보이고, 2장의 꽃잎은 꽃받침잎들이
둘러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수술은 여러 개이며 암술은
3개이다. 봄과 가을에 뿌리를 캐서 햇볕에 말린 것을
진범이라 하여 진통제나 치풍제로 쓴다.(申鉉哲 글)
♧ 백로(白露) - 장승진
올 여름은 무덥고 비가 많아
주먹만한 감자들이 다 썩었습니다
늦은 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별을 봅니다
여기는 외딴 동네라
별이 참 굵습니다
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글때글해서 좋습니다
썩지도 않고 매일 자라나는
희망을 꿈꿔 본 사람이라면
참으로 부러워할 밤의 꽃밭이예요
죽을 때 가슴에서 별이 쏟아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부디 와서 보세요
밤새 별들이 슬어놓은
아침 햇살 속
때글때글한 이슬방울들도요.
♧ 우리의 백로는 - 김지헌
백노가 날고 있다.
미군부대 철책안
무기고 옆에서
낙원을 펼치고 있다.
접근 금지의 팻말 안에서
지뢰밭의 보호를 받으며
독수리 마크가 찍혀 있는
미합중국 격납고는 새들의
갈라파고스
전투기와
백로와
말보로를 물고 있는 카츄사가
함께 평화를 누리고 있는
♧ 백로는 보이지 않고 - 오정방
일년 이십 사 절기 가운데
오늘 열 여섯번 째 절기로 맞는 백로
새벽에 일어나 풀잎을 보아도
흰이슬 백로白露는 보이지 않고
저녁 해거름에 하늘을 보아도
해오라기 백로白鷺도 보이지 않는다
내게 보이지 않았다하여
흰이슬이 내리지 않은 것도 아닐테고
해오라기가 다 멸종된 것도 아닐텐데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나 모르는 어느 곳엔가는
하마 백로白露가 새벽을 적시고
나 모르는 어느 하늘엔가
진작 백로白鷺가 날개를 폈으리
♧ 백로 - 박인걸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선선한 바람에 맥을 못 추고
짙푸르게 무성하던 숲도
어쩔 수 없이 빛이 바래는 구나
절정으로 치닫던 참매미노래도
이제는 종적을 감춘
구슬픈 귀뚜라미 소리만
가을이 문턱에 있음을 알린다.
한 시절이 가고 오는
일정한 순환의 법칙 아래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는
젊은 날의 아쉬움이여
풀잎을 흠뻑 적시는 아침이슬은
젊음을 잃는 슬픔의 눈물일까
되돌릴 수 없는 운명 뒤안길에서
잎 새를 흔드는 바람처럼
못내 아쉬운 섭섭함이여
꽃잎은 점점 시들고
나뭇잎 한 잎 두 잎 질 때면
여문 알맹이들만이 빛나겠지만
푸르름이 사라질 들판에서
초점 잃은 사슴의 눈망울처럼
멍하게 하공만 바라다본다.
♧ 귀뚜라미 - 혜천 김기상
너희를 일러
가을의 전령사라 했더냐
귀뚜르 귀뚜르 귀뚜르르
귀뚫어라 귀뚫어라 귀를 뚫어라
해넘이 저녁녘부터
해돋이 새벽녘까지
어지간히도 울어대는구나
그토록 목이 쉬도록
고스란히 밤을 새워 울부짖음은
가을이 오고 있다는 소리냐
가을은 이미 와 있다는 소리냐
아니면
이제사 입을 모아
제발 서둘러 와 달라고 보채는 소리냐
모레면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
길가에 심어진 코스모스들
서둘러 꽃을 피워내고 있으니
정녕 가을이 곁에 와 있음을 알겠구나
오냐
귀를 열어 듣고 있느니라
너희가 전하고자 하는 이런저런 소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