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엽의 시와 독일잔대
지난 8월 13일, 제주작가회의 회원의 날에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 창작 스튜디오 개관식에
참석하려고 모였는데, 바람이 조금 있다하여 배가
뜨지 않아 그냥 저지오름 등에 오르고 헤어지는 길에
3인의 문우와 같이 방림원에 들러 여러 꽃 중
얍상한 모습에 생김새는 반듯한 이 꽃에
‘독일잔대’란 이름표가 달려있어 찍어두고 잠시 잊었는데,
사진을 정리하다가 보고, 김수엽의 시 몇 편과 함께 올린다.
김수엽 시인은
1958년 전북 완주 출생
1991년 ‘합죽선’으로 샘터 시조상 가작 당선
1992년 ‘겨울강’으로 중앙일보 연말 장원
1995년 ‘유리창’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역류 동인으로 참여하여 ‘강은 역류를 꿈꾼다’ 등 공동 시집 간행
현재 전북 군산여자고등학교 교사
시집 ‘상쇠, 서울가다’ 태학사. 2006.
♧ 유리창
이 아침, 내 뜰 안을 팽팽하게 채운 안개
닦으면 닦을수록 일어서는 투명한 벽
잊고 산 얼굴 하나가 물방울로 흘러내리고
밖은, 갓 헹구어 낸 빨래 같은 풍경들
바람 따라 도막도막 박음질로 수런대고
눈 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빗물 또는, 폭설에도 지워지지 않은 문신
갈아 끼운 계절 따라 혹처럼 왜 돋아나는지
아직도 등을 맞대고 선 왼손과 오른손
차라리 내 몸에 걸친 불을 꺼 보았다.
길은 사방으로 더 선명하게 뻗어 있고
마침내 무너진 벽으로 달빛 가득 차 온다.
♧ 이중 창문
너와 맞서온 투명한 거리만큼
엿보고 싶은 욕망이 요약되어 있는 풍경
거기엔 핏빛 문신이 가로 누워 있었다.
겉창까지 열어보면 묽은 어둠살에서
붙박혀 살이 찐 녹슨 뼈마디 걸어 나와
방충망 그 네모마다 선분으로 걸쳐온다.
내 둘레의 불을 끄면 더 선명한 기억 하나
바람의 지느러미가 문풍지로 절룩일 때
적당한 높낮이로 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다 안개 그물로 건져 올려진 이 아침
뒤틀린 길을 따라 또 하나의 곧은 길에
씨방을 터트려 웃는 풀꽃들이 저 행진.
♧ 합죽선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먼 산 퍼지는 종소리
가야금 우는 가락엔
도포자락 날렸다 펴고
어깨를
들썩이다간
바람 따라 춤춘다.
♧ 겨울강
보아라 겉으로는
무능한 뼈마디로 굳어
머리를 흔드는 바람
두드리는 눈발도
거부할 몸부림조차
시작되지 않았다.
올려보면 썰렁한
가지마다 순백의 덧칠
산맥은 사연 한 줄
남기지 않고 내달리다
내 위에 그림자로 오는
짓밟힌 기억 하나.
묶인 몸 소리로 풀어
산을 감아 무너지면
땅속 틔는 숨소리도
푸르게 누벼오고
마침내 은비늘 돋는
가장 깊고 낮은 곳.
♧ 만경강 죽다
괜찮은 가문이다
꽤 그럴싸한 뼈대
내 유년 들춰보면 투명한 약속들
모두가 속삭임 없이 등 맞대고 산단다.
하수구로 내뱉어진
쓰디쓴 마침표들
죽은 송사리 떼
참외 씨같이 펄럭인다.
낚시꾼 삶을 털어 내는
낯익은 풍경 하나
거품을 휘갈겨 논 야윈 강가에서
내 가슴을 친다, 내 눈을 비벼 뜬다
시커먼 눈동자가 터진
내 몸이 쓰러진다.
♧ 창문과의 대화 1
--술집에서
젊은 가로등이 내 시선을 덮쳤다
순간, 배경이 된 어둠이 지워졌고
끊어진 곧은 길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승용차들 불빛 따라 길을 건축한다
한 사내 머리 위로 입김을 뽑아 올릴 때
두 눈을 깜빡이며
버스 한 대 배달된다
그렇게 내 눈에 박힌 사람들이 빠져 나가고
길도 낯익은 기계음을 벗어 던지며
천천히 먹물을 터트려 잔잔하게 퍼진다
피로가 빽빽하게 저장된 내 살덩이들
자꾸만 코 끝으로 집 냄새를 들이쉰다
참 오래 잊고 산 집이
술잔 속에 젖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