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수엽의 시와 독일잔대

김창집 2011. 9. 10. 00:18

 

지난 8월 13일, 제주작가회의 회원의 날에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 창작 스튜디오 개관식에

참석하려고 모였는데, 바람이 조금 있다하여 배가

뜨지 않아 그냥 저지오름 등에 오르고 헤어지는 길에

3인의 문우와 같이 방림원에 들러 여러 꽃 중

얍상한 모습에 생김새는 반듯한 이 꽃에

‘독일잔대’란 이름표가 달려있어 찍어두고 잠시 잊었는데,

사진을 정리하다가 보고, 김수엽의 시 몇 편과 함께 올린다.

 

 

김수엽 시인은

1958년 전북 완주 출생

1991년 ‘합죽선’으로 샘터 시조상 가작 당선

1992년 ‘겨울강’으로 중앙일보 연말 장원

1995년 ‘유리창’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역류 동인으로 참여하여 ‘강은 역류를 꿈꾼다’ 등 공동 시집 간행

현재 전북 군산여자고등학교 교사

시집 ‘상쇠, 서울가다’ 태학사. 2006.

 

  

 

♧ 유리창

 

이 아침, 내 뜰 안을 팽팽하게 채운 안개

닦으면 닦을수록 일어서는 투명한 벽

잊고 산 얼굴 하나가 물방울로 흘러내리고

 

밖은, 갓 헹구어 낸 빨래 같은 풍경들

바람 따라 도막도막 박음질로 수런대고

눈 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빗물 또는, 폭설에도 지워지지 않은 문신

갈아 끼운 계절 따라 혹처럼 왜 돋아나는지

아직도 등을 맞대고 선 왼손과 오른손

 

차라리 내 몸에 걸친 불을 꺼 보았다.

길은 사방으로 더 선명하게 뻗어 있고

마침내 무너진 벽으로 달빛 가득 차 온다.

 

  

 

♧ 이중 창문

 

너와 맞서온 투명한 거리만큼

엿보고 싶은 욕망이 요약되어 있는 풍경

거기엔 핏빛 문신이 가로 누워 있었다.

 

겉창까지 열어보면 묽은 어둠살에서

붙박혀 살이 찐 녹슨 뼈마디 걸어 나와

방충망 그 네모마다 선분으로 걸쳐온다.

 

내 둘레의 불을 끄면 더 선명한 기억 하나

바람의 지느러미가 문풍지로 절룩일 때

적당한 높낮이로 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다 안개 그물로 건져 올려진 이 아침

뒤틀린 길을 따라 또 하나의 곧은 길에

씨방을 터트려 웃는 풀꽃들이 저 행진.

 

  

 

♧ 합죽선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먼 산 퍼지는 종소리

 

가야금 우는 가락엔

도포자락 날렸다 펴고

 

어깨를

들썩이다간

바람 따라 춤춘다.

 

  

 

♧ 겨울강

 

보아라 겉으로는

무능한 뼈마디로 굳어

머리를 흔드는 바람

두드리는 눈발도

거부할 몸부림조차

시작되지 않았다.

 

올려보면 썰렁한

가지마다 순백의 덧칠

산맥은 사연 한 줄

남기지 않고 내달리다

내 위에 그림자로 오는

짓밟힌 기억 하나.

 

묶인 몸 소리로 풀어

산을 감아 무너지면

땅속 틔는 숨소리도

푸르게 누벼오고

마침내 은비늘 돋는

가장 깊고 낮은 곳.

 

  

 

♧ 만경강 죽다

 

괜찮은 가문이다

꽤 그럴싸한 뼈대

내 유년 들춰보면 투명한 약속들

모두가 속삭임 없이 등 맞대고 산단다.

 

하수구로 내뱉어진

쓰디쓴 마침표들

죽은 송사리 떼

참외 씨같이 펄럭인다.

낚시꾼 삶을 털어 내는

낯익은 풍경 하나

 

거품을 휘갈겨 논 야윈 강가에서

내 가슴을 친다, 내 눈을 비벼 뜬다

시커먼 눈동자가 터진

내 몸이 쓰러진다.

 

  

 

♧ 창문과의 대화 1

--술집에서

 

젊은 가로등이 내 시선을 덮쳤다

순간, 배경이 된 어둠이 지워졌고

끊어진 곧은 길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승용차들 불빛 따라 길을 건축한다

한 사내 머리 위로 입김을 뽑아 올릴 때

두 눈을 깜빡이며

버스 한 대 배달된다

 

그렇게 내 눈에 박힌 사람들이 빠져 나가고

길도 낯익은 기계음을 벗어 던지며

천천히 먹물을 터트려 잔잔하게 퍼진다

 

피로가 빽빽하게 저장된 내 살덩이들

자꾸만 코 끝으로 집 냄새를 들이쉰다

참 오래 잊고 산 집이

술잔 속에 젖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