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은숙의 시와 층꽃나무
몇 달 전에 홍성운 선생으로부터
'역류' 동인 10주년 기념 시선집인
'13현의 푸른 선율'이란 제목의
자선 15편 및 작품론집을 받았다.
실린 글들이 마음 깊은 곳까지 닿아
한 분 한 분 작품을 틈나는 대로
이곳에 모시고 있다.
우은숙 시조시인은
1961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7년 중앙 시조대상 신인상수상
시집에 ‘마른 꽃’(2001, 동학사) 출간.
층꽃나무는 마편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30~60cm이며, 잎은 마주나고
달걀 모양으로 톱니가 있다. 7~8월에 자주색
또는 흰색의 작은 꽃이 취산꽃차례로 줄기를 둘러싸며
층층이 피고 열매는 핵과(核果)를 맺는다.
우리나라의 남부,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
♧ 따뜻한 하루
온 종일 달을 키웠다
시린 손을 말리면서
눈물을 매단 새는
좌표를 행해 날고
벌판을 걸어온 창문
꾸역꾸역 뒤따른다
지친 발에 걸린 눈썹
낮은 길로 돌아들자
내 몸을 감싸던 벽
푸른 잎 여리게 돋고
허기진 저녁의 숲엔
따스해지는 발자국들
♧ 가난한 축제
우리 동네 과수원에 봄마다 피는 배꽃
올해도 어김없이 허리 휠 듯 피었는데
고딕체
영농금지가
개발구역 통보한다
숨 막히게 피워낸 눈부신 절정의 행렬
시리도록 폭죽 터진 저 축제 언제 끝날지
아찔한
고요의 시간
화두처럼 번져갈 쯤
난 재빨리 몸 안으로 배나무를 가지고 와
거친 내 몸 구석에 정성 다해 심는다
입안은
금방 배꽃으로
가득 찬 수레다
그 때, 과수원 앞 좁은 길 사이로
천천히 자전거를 밟고 오는 사내 아이
스르륵
흰 꽃잎 열고
배꽃으로 들어온다
♧ 동행
강물 위를 달리는
춘천행 2시 기차
기다림의 휘장 두른
땀내 절은 긴 의자에
어머니
눈물 같은 강
출렁출렁 올라탑니다
한 때는 강이었고
한 때는 기차였던
어머니 젖은 숨에
포개진 내 그림자
한순간
동행이 됩니다
터널 속이 환합니다
♧ 뜬 돌에게 묻다
그 어떤 물음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누워 흐르는 돌 앞에 허방 딛은 막막함이
빈혈의 꼬리를 잘라 감춰 둔 까닭이지요
공중에 매단 꿈이 한사코 발버둥치는
부석사에 노을지면 풀벌레 가득 모여
끝끝내 해답 없는 물음 하나씩 꺼냅니다
갈급한 허기 담긴 실타래를 풀고 나니
가슴 휙, 치고 가는 잊었던 원시의 꿈
싱싱한 자유를 쫓는 화살이 됩니다
♧ 시간의 눈금
절반쯤 걸어왔을 굳은살의 꽃밭에서
수많은 마침표를 꽃잎처럼 등에 달고
맨발로 눈금을 새긴다. 또 한 줄이 보태진다
한 금 한 금 짚어가며 읽어보는 갈피마다
아쉬움의 덧칠 흔적 숨이 헉헉 막히지만
백비(白碑)의 내일이 있다. 짜릿하게 꽃물 드는.
♧ 변산반도
하늘 닦던
햇살이
수평선을
핧아주고
자막처럼
달려와
들뜬 속살로
내 안을
확, 펼쳤다가
이내 접는
변산
반도
♧ 안개 그리고 길
지워진 길 위에 길 하나를 만들고,
또 하나의 길 지우는 그 길 위에 내가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길을 또 지워야 하리.
철없던 외침을 날개에 새겨 넣고
하늘을 건너는 은빛 나비 한 마리
빈 배는 나침판 없는 더듬이를 쏟아낸다.
길 위에서 길을 잃어 혼자가 된 내 앞에
수척한 뒷춤 열고 줄을 서는 기운 상처
그 상처 안개에 걸린다, 이슬에 걸린다.
♧ 사랑은 그래서 아프다
꽝꽝 언 왕송저수지에 얼음썰매 타면서
호기심에 건넌다
무언가 툭! 발에 채인다.
얼음 틈,
보시의 배를 내민
물고기 한 마리
여몄던 단추 풀고 겨울 철새 허기 위해
풍장으로 누워 있는 물고기의 허연 살점
총ㆍ총ㆍ총
새들의 발자국
빙판 위에 바쁘다
숨 가쁘게 살아왔을 물고기 한 생이
물감처럼 번져 와 하늘 한번 쳐다보니
그 속에
낯익은 미소로
웃고 있는 내 어머니
새 먹이 된 물고기처럼 몸을 비운 내 어머니
그 살점 뜯어먹기 위해 안간힘을 쓴 나에게
이제는
탄력도 없는 가슴
오늘도 저리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