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욱의 시와 자주색달개비
몇 달 전에 홍성운 선생으로부터
‘역류’ 동인 10주년 기념 시선집인
‘13현의 푸른 선율’이란 제목의
자선 15편과 작품론을 모은 책을 받았다.
실린 글들이 마음 깊은 곳까지 닿아
한 분 한 분 작품을 틈나는 대로
이곳에 모시고 있다.
정성욱 시조시인은
경남진주 출생으로
1989년 무크지 ‘지평’에 ‘칼에 대하여’외 4편으로 작품활동 시작
198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으로 ‘겨울 남도행’ 등이 있다.
자주색달개비는 멕시코 원산으로 생육적온은 16~30℃, 월동
온도 10℃ 이상이다. 줄기와 잎이 모두 붉은 자주색인데,
줄기는 길이 40~60cm 정도로 자라고, 잎은 길이 10㎝내외
폭 3㎝내외이고 약간 다육질로 긴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부드러운 털이 있다. 꽃은 분홍과 빨간색을 띠며 줄기의 끝에
핀다. 꽃만 자주색인 자주달개비와 구분하기 위하여 자주색
달개비로 명명한 모양이다.
♧ 겨울 벌판에서
저 몇 겹 빙하의 땅 눈발이 날리고 있다
눈보라에 실려 가는 가벼운 너의 중량
하늘로 가 닿은 길이 폭설 속에 지워진다.
사랑은 빙판 위로 맨발로 걸어오고
오랑캐꽃 속살로써 해빙하는 겨울 벌판
빛살의 은하를 굴리듯 눈이 부신 동토여.
갈증으로 찢긴 깃털 겨울새가 날아든다
첨탑에 머문 바람 지상에서 풀어지고
발목을 끌며 끌며 오는 예감의 삼월 봄날.
가슴 안 푸른 수액 신열을 뒤척인다
소금기에 절은 아픔 풀꽃으로 피어나고
다 떠난 적막을 쓸며 꿈을 꾸는 모둠발.
빛이여 새의 부리 끝으로 돋아나는 기운이여
무시로 젖어드는 무한 속의 떠돌이 별
마지막 살에 살 비비며 어둠 속을 걷는다.
♧ 몸 속의 새
저문 길을 돌아가면 적요 속의 새가 보인다
날개, 저 푸른 날개 내 몸 속에 새가 있다
비상의 힘찬 하늘로 사라지는 새가 있다.
언젠가 내 몸 속의 새 한 마리 보았다
어둠 속 적요를 날카로운 부리로 쪼개는
저 새를 아무도 몰래 오래도록 키워 왔다.
♧ 흔들리는 구도
사진들이 흔들리면 바다가 흔들린다
목선이 흔들리고 등대가 흔들린다
한순간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세상숲
숲이 흔들리면 길 위에 선 내가 흔들리고
내가 흔들리면 온 가족이 흔들린다
비로소 대못이 빠져 기우뚱하는 집기둥
누가 나를 흔드는가 견고한 못을 뽑는가
흔들어서 흔들리지 않는 무엇이 아직 남아
녹슨 내 머리채를 잡고 밤새도록 뜯는다.
♧ 석남사 가는 길
길 끝에 놓아버린 幻(환)인가 싶었더니
어느새 심장 날카로운 針(침)으로 박힌 고독
이 불혹 견디지 못했던 내 사랑이 있었다
문득 돌아보면 실타래처럼 풀려 가는 인연
아찔하게 눈물 핑 도는 눈물인가 싶었더니
비구니 홍조 띤 얼굴 그런 사랑이 내게 있었다
내가 버린 것들 이제 다시 주워 모으고
버리지 못했던 것들 다시 다 버리고 나면
몸 중에 오래 남았던 그런 사랑이 내게 있었다.
♧ 장성역
- 서옹 큰 스님
저 새 우는 소리는
내가 목놓아 우는 소리다
그 소리에 내가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
꺼억 컥 세상 뜬 스님
풀지 못할 적, 멸, 탈
길에 던져버린 화두
다시 주워 삼키다가
무장무장 내리는 눈꽃
눈꽃 무게에 눌린 몸,
씹어도 다 씹을 수 없는
결코 소화할 수 없는 公案(공안)
♧ 새벽 두시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몰래 깨어 있다
고장난 시간들이 귀를 뚫고 지나가고
쓰다만 시의 문장들이 흩어져 나를 괴롭힌다
십년 食率(식솔), 자궁보다 깊은 여자의 숨소리
나와 그녀가 만든 피보다 진한 아이들
시보다 더 희망적인 새끼들은 잠들어 있고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시가 되는 새벽 두시
눈물은 다 말라붙어 눈물이 될 수 없는 세상
하룻밤 물먹은 별이 유리창에 반짝인다.
♧ 그대 간 곳은
길은 나를 한사코 남도로 끌고 가고
다시 잡풀처럼 자라는 내 안의 추억 한 점,
가문비 가문비나무 늦은 비가 내렸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빗장처럼 잠근 세월
상처는 아물다가 봄볕처럼 다시 도지고
쓸쓸히 돌아앉아서 부르는 나의 노래.
♧ 가장
당신 낮은 어깨 위로 왜 그리 바람만 부는가
세종대왕 하나면 아이의 내일 소풍을
세종대왕 하나면… 세종대왕 하나면…
중얼거리면서 골목길을 돌아서면
점점 낮아지는 저녁 해
그려진 왕의 위엄이
오늘따라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