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잎유홍초와 추분
작년말 제주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됨에 따라 조금 반짝하는 기간이 되었는지
요즘 일은 그에 대한 글을 쓰고, 고치는 일과가
계속된다. 요즘 들과 산을 다니다 보면 빨갛게
피어 자생하는 이 꽃을 많이 보게 된다. 어제
조금 추운 곳을 다녔더니, 콧물이 많이 흘러
환절기인 걸 느꼈더니, 오늘이 추분이란다.
둥근잎유홍초는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메꽃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로 덩굴식물로 북미,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관상용으로 재배하기도 한다.
꽃은 홍황색으로 8~9월에 핀다. 잎이 나팔꽃 같은
둥근 모습이며, 새깃처럼 생긴 것과 아주 가느다란
잎을 가진 것도 있어, 이름으로 구별한다.
추분(秋分)은 24절기의 하나로 양력 9월 23일경이다.
백로(白露)와 한로(寒露) 사이에 있는 절기로 음력 8월,
춘분으로부터 꼭 반 년째 되는 날로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며,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므로 계절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논밭의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각종
여름 채소들과 산나물 등을 말려두기도 한다.
♧ 나는 불 꺼진 숲을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 고영
추분 지나 급격하게 야위는 가을밤,
실내등 불빛 아래서 『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를 읽다가
랭보의 무덤에 이르러 나는 밑줄을 긋는다
밑줄 아래로 펼쳐진 회화나무 숲에서
자유롭게 비행하는 산비둘기가 보였다
잉크로 쓴 내 첫사랑은 유성이 되었다
검정파랑빨강 삼색의 잉크병을 비우면 희망도 상처로 번졌다
책을 떠나서 가벼워진 단어들 문법들 그리고 금방이라도
뾰르릉 날아갈 것 같은 詩語들,
유혹은 놓칠 수 없는 것들만 밤새 끌고 다녔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숲은 마약처럼 위험했다
부도난 어음은 찢겨져 길거리에 뿌려졌다 지갑 속에서
낯선 명함들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내 연락처엔
야윈 발자국들만 웅성거렸다
바람이 이끄는 길을 밟고 가기도 너무 벅찼다
세상은, 문법이 통하지 않는 미로 같았다
랭보의 무덤을 지나 밑줄도 끝났다
밑줄 너머로 펼쳐진 회화나무 숲에서
아름다운 유성을 품고 있는 산비둘기가 보였다
저토록 눈부신 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산비둘기 날 때마다 숲은 환해졌던 것인가
나는 불 꺼진 숲을 이제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 추분을 지나는 낙엽은 - 류외향
추분을 지나는 낙엽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추고 있는가
저리도 즐겁게 무덤으로 몰려가는 낙엽이
열어 놓은 길 위로
거듭되는 안개,
사람은 마음의 가장 엷은 쪽이 안개에 젖는다
추분을 지나는 사람의 마음은
한 그루 나무를 톱질한다
시간의 순라꾼들이 밑동을 차며 지나가고
잘 단장된 장례 행렬이
흙을 실어 간다
마음이 가라는 쪽이 어딜까
마지막으로 빈 나뭇가지가
조금 뒤척인다
차가운 날이 시작되고
새들의 목발질 소리,
허공의 두꺼운 웃음소리
들으며 조금씩 흔들리고
조금씩 젖으며
약속하지 않은 곳으로 간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바람이 슬쩍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다
♧ 인사동 밭벼 - 손세실리아
인사동에서
발목까지 잘박잘박 눈물로 차 오른 밭벼를 보았다
숙련공처럼 씨알마다 포말 가득 채우고도
정갈한 바람 한 점 수태시키지 못해
뒤엉켜 쓰러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기립의 슬픈 생애을 보았다
이 시대 깨어있는 자들의 전생이
고서상 목선반 묵은 먼지되어
더께 낀 전설쯤으로 휘어져 버린 저 길목 어디쯤에
산길 먼 촌동네 전구알같은 벼이삭
그 새끼친 알곡의 조각난 꿈을 보았다
추분秋分 넘긴 파리한 살갗
겨울갈이 꽃배추에게 몇 뼘 밭뙈기 내어 주고
종로구청 쓰레기 수거 차량 잡쓰레기에 몸 섞기 전,
누군가 밤새 몰래 베어다가 새벽 말간 물에 불려
지상의 어떤 아름다운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승의 밥으로 지어져 주발에 고봉으로 담겨지기를
지하철 3호선 대화행 막전철이 오고 있다. 저기
사람들이 타고 또 내린다
♧ 경전(經典) - 고재종
차랑차랑, 순금 이삭 일렁이는
추분의 들판에 서서
먼 곳으로 고개를 드는 어머니의
수정 눈물은 나의 경전이다
지난여름 큰비 큰바람에
죄다 꺾인 닷 마지기 논을
죄다 일으켜 세우고
당신의 허리가 꺾이어선
자리보전하던 어머니를 나는 안다
시방 김제 만경 들판에 가보아라
하늘이 어쩌려고
그토록 순금 햇살을 쏟아 붓는지
쏟아 부어선 따글따글 익히는 게
어머니의 수정 눈물은 아닐는지
지평선을 바라보지 말자
왕배야덕배야, 내가 가 닿을 곳은
저 논에서 피를 뽑다
피투성이 흙감탱이 몸으로
나를 낳고 낳은 어머니의 환한 품
죽어서 하늘로 가지 않고
저 시리게는 신신한 땅에 묻히는
어머니의 수정 눈물이
추호라도 삼가는 나의 경전이다
♧ 가을 유혹 - 권오범
어정쩡한 보폭의 추분과 한로 사이
노라리 소슬바람 제세상 만나 객기 부리다
탱자나무 가시에 찔렸나보다
탱자가 푸르락누르락 기겁한 걸 보니
곁에서 살 떨리는 광경 목격했는지
석류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대추도 알라꿍달라꿍
감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생화에 들숨 날숨 없어 퍼석해진 마음
역마살 도지도록
들썽하게 불 질러놓고
하늘은 어찌 저리도 멀쩡한 것이냐
자줏빛이던 맥문동 모가지엔 꼬치꼬치
옥구슬 목걸이 걸고 곤댓짓 하지요
코스모스는 시도 때도 없이 는실난실
허술한 감성을 잔인하게 꼬집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