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크령 이삭에도 가을이
그제 낮부터 끊어진 인터넷, 어떻게 해결해보려 했으나 안 돼
어제 KT에 신고했더니. 오늘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다녀갔다.
한 달 전쯤 새로 바꾼 모뎀에 아답터에 이상이 생겼다 한다.
모든 생활이 인터넷과 연결돼 돌아가는데, 그게 안 돼 놓으니
뭔가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느슨하고, 컴을 켜도 할 일이
없는 것 같아 원고와 사진 정리로 시간을 보냈다. 없을 때는
그에 맞춰 살았는데, 생활 패턴의 변화란 게 그처럼 불편한 줄
비로소 깨닫는다.
수크령은 볏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30~80cm이며, 잎은 빳빳하고 좁은 선 모양이다.
9월에 검은 자주색 이삭이 잎 사이에서 나오는데
가시랭이와 털이 빽빽하다. 들이나 양지바른 곳에서 저절로 나며,
아시아 온대에서 열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 가을이 익어갈 때면 - 松花 강 봉환
길 섶 따라 풀벌레소리 귀 기우리며 걸어가다 보면
언제나 푸르를 것 같은 새파란 길 섶 잡초들 사이로
후-두-둑 하는 소리에 나도 몰래 인기척에 놀라서
제 갈 길 바삐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참새 떼들
그중에는 아침마다 방울방울 이슬을 머금기도 하고
노을빛을 받아 금빛 찬란하게 하늘거리듯 맞이하며
은은하고 감동적인 가을에 정취를 알리는 수크령에
왠지 모를 설렘에 마음마저 빼앗기던 시절이 있었지
하염없이 걷는 산책길에 만나는 이름 모를 잡초들에
단연 돋보이듯 석양빛에 짙어져 가을을 알리던 서곡
그곳에 나 홀로 뽐내듯 우쭐대며 가을색이 돋보이고
가을을 알리려는 듯 솔솔 부는 바람에 하늘거리기만
그 옛날 풀을 매어 은혜를 갚는다는 풀, 수크령 군락
결초보은이라는 고사성어마져 생겨나게 한 낯익은 풀
이른 아침부터 모두 수크령 풀 섶에 묻혀 조잘거리듯
시끄럽게 쪼아대는 참새 떼에게 더 없는 먹이 감으로
가을은 이렇게 조용한 풀 섶 합창에 익어가는가 보다.
♧ 가을 비 - 박인걸
단풍을 재촉하는 비가
거룩한 의식(儀式)을 베푼다.
곱게 늙는 초목에
성례수가 관수(灌水)될 때
나무들 마다 목례를 하고
뒤늦게 피는 들꽃은
마주보며 찬양을 한다.
사납던 들 바람은 묵상을 하고
시끄럽던 세상이
주일 예배처럼 경건하다.
가을이 올 때면 이렇게
성우(聖雨)를 쏟아 부어
오염된 세상을 정화한다.
이런 날이면 나는
들길을 걸으며 비를 맞는다..
가슴으로 내리는 빗물이
겹겹이 쌓인 오욕(汚辱)들을
말끔히 씻어내면서
마음을 단풍 빛으로 물들이라 한다.
풀잎에 묻은 얼룩을 보면
오늘의 성례는 길어질 모양이다.
♧ 들꽃처럼 만난 그녀 - 박효찬
오래간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은
들꽃처럼
청아하고 단아하던 모습 그대로 였다.
슬프고
세월 속에 낡아 버린 향기는
먼 여행길에 두고 온 듯
풋풋하고 달콤한 향기로
그녀가 왔다.
엷은 햇살의 꽃샘추위로
눈비 속에 빛을 내려놓은 것처럼
우리는
아련한 추억의 그림자를
하얗게 변해버린 기억에서
더듬거리며 찾았고
약손이 된 손으로
서로 아픈 상처를 감싸 안으며
술잔의 한 모금 삼켜내는 그리움
눈물로 채우고
돌아오질 않을 우리들의 사랑들을
달 그림자로 지우며
해가 뜨고
서로 다른 공간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아직은
검은 그루로 들녘은 남아 뒹구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배웅한 이 길 따라 돌아올 널 기다려본다.
♧ 가을 마중 - 권오범
귀뚜리 기별 받고 선바람에 나간 광나루
갈대들이 밤새 별빛에 머리 감고
에부수수하게 털거나 말거나
햇볕 채뜨려 먹고 눈부시게 곤댓짓하는 억새들
강변 따라
잡초들 넘나들지 못하도록
오래 전에 단단히 비끄러맨 마사토 길
사그락사그락 끌어당긴다
칠칠맞아 고샅이 된 싸릿골 언덕 넘어
하릴없이 축 늘어져
수크령들과 함께 서성대는 버드나무 지나
미사리 향해 시방 한 시간 째
소근대는 철새들에게 한눈팔다
뒤돌아 강 건너 아차산 풍경 가슴에 담다보니
하얀구름 한 무더기가 나와 동행하고 싶은지
파란 하늘바다 가로질러 헤엄쳐오는 이 기막힌 한낮
♧ 나는 오늘도 너를 마시고 싶다 - 권경업
몽롱한 비취빛, 매끄러운
네 살결을 탐해서가 아니다
긴 목으로부터 흘러내린, 부드러운
가슴 선(線)의 아름다움에 혹해서도 아니다
기울여도 평정을 유지하고
출렁이다가도 갈앉는
맑디맑은 네 영혼에 흠뻑 취하여
탁한 나를 쓰러뜨려야한다
내 작은 잔에, 오늘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부은, 너
빈 가슴에 머리 기대어
먼 취밭목 솔바람 소리 듣고 싶다, 소주
참진(眞) 풀꽃이슬 같은
..................
*주: 취밭목은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 연봉인 중봉 바로 아래, 장당골과 조개골 상부에 있는 1400m 고지의 지명이다. 등산객을 위한 조그만 유인(有人)대피소가 있고 그 인근에 하봉, 써레봉, 쑥밭재, 왕등재, 새재, 밤머릿재, 신밭골, 장당골, 무제치기폭포, 오봉리, 유평리, 대원사, 덕산장터, 원지삼거리, 엄천강 경호강 덕천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