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을 맞은 산딸나무
서리가 내린다는 한로 즈음, 산딸나무 열매도
곱게 익어간다. 지난 8월 태풍 무이파가 나뭇잎을
다 털어버려 좀 섭섭하긴 하나 태양의 세례를
많이 받는 한편으로 영양가 공급이 부실해서인지
제빛을 잃어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상강(霜降)은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한로와 입동
사이에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인 10월 23일경이다.
산딸나무는 층층나뭇과의 낙엽 소교목으로 높이는
6m 정도이며, 잎은 달걀 모양이다. 6월에 흰 꽃이
가지 끝에 두상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취과이다.
목재는 가구의 재료로 쓰고 열매는 식용하며
정원수로 재배한다. 산지의 숲 속에 자란다.
♧ 상강(霜降) 무렵 - 곽진구
비온 뒤의
푸른 하늘로부터 알음알음으로 찾아드는
저것이 무엇이냐
이 나무 저 나무 할 것 없이
무너질 듯 반짝거리는 통에 눈부셔 못 보겠다
저 애처로운 몸짓이 끝나면
고요만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을 건 뻔한 일
그 사실을 알면서
시방 나무들은 떼를 지어 몸에 불을 놓은
경건한 이 놀음을 정신없이 해대는구나
누구를 위한 소신(燒身)이더냐?
나는 뜻 두고 근엄하게 묻긴 묻는다만
기실 이파리 하나가 타다 질 때마다
이 땅 어딘 가에서
삶에 지친 나 같은 이 하나가
조용히 사라지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렵다, 이승의 불성스런 나날이여
♧ 상강(霜降) - 권경업
어둠 속 내[川]를 이루던 제 울음 따라
뭇벌레들 떠나간
어제가 상강(霜降)이었습니다
첫눈은 곧 내릴 텐데
가 버린 이들 다시 오지 않아
야윈 어깨 옷깃 여미며 가을이
치밭목을 내려갑니다
마른 꽃잎 하나 흔드는 이 없는
이토록 쓸쓸한 배웅을
올해도 나 혼자만이 해야 합니까
♧ 상강 - 백우선
들국화를
바라본다
햇살과 바람의
밝고 서늘한 몸짓,
그 얼굴을 본다
그도 나를
마주본다
내 몸을 어루만지는
향기로운 눈길,
눈빛 속에 나부껴 보는
한 꽃송이――
들녘은
맑게 빛나는
꽃밭이다
♧ 상강(霜降)무렵 - 정군수
내 젊은 날의 서리는
독살스런 얼굴로 초가지붕을 덮었고
지붕보다 더 높은 곳의 나무들을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작은 나의 뜰
어린 꾳봉오리를 무참하게 꺾어버렸다
가을의 절망을 모아다 불태우며
그 서리보다 더 매운 서리가 되어
거만한 오기로 세상을 덮고 싶었던 나
번뜩이는 빛 한 번 밝혀보지 못하고
지명(知命)의 고개를 넘어
고운 단풍 반짝이는 霜降상강무렵
나의 머리는 정말 서리가 되어
세월을 이기고
강물에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거만한 오기는
강 저편에다 모래성을 쌓아 놓고
물 따라 흘러가고
나는 찬 강물에 발을 적시며
霜降상강의 머리를 비워내고 있었다
투명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가벼워지는 나를
빗질하고 있었다
♧ 상강 - 나태주
갑자기 눈이 밝아져 귀가 밝아져
마른 풀덤불 속 다리 뻗은 무덤
다시 생각나야 할 때.
따신 햇볕살 익어가는 하이얀 촉루
다시 그리워야 할 때.
그대를 잊어버려 아주 뿌리째 잊어버려
세수하고 난 어느 날 아침
수건으로 코피를 닦으며
그대 생각 다시 새롭게 떠올리기 위하여.
피 먹은 골짜기 너머
미리 띄워둔 몇 송이 조각구름
빨간 등산복이라도 하나 사서 입혀
멀리 떠나보내고,
동산 위 무덤 밖
들국화 같은 것 세워둔 채,
형용사며 부사 따위 벗어둔 채,
명사와 대명사로만 앙상히 누워 있어야 할 때.
열일곱 살 처녀귀신
대추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면
우리도 여봐란 듯이
죽어줘야 할 때,
죽어줘야 할 때가 천천히 오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