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상강을 맞은 산딸나무

김창집 2011. 10. 25. 00:33

 

서리가 내린다는 한로 즈음, 산딸나무 열매도

곱게 익어간다. 지난 8월 태풍 무이파가 나뭇잎을

다 털어버려 좀 섭섭하긴 하나 태양의 세례를

많이 받는 한편으로 영양가 공급이 부실해서인지

제빛을 잃어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상강(霜降)은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한로와 입동

사이에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인 10월 23일경이다.

 

산딸나무는 층층나뭇과의 낙엽 소교목으로 높이는

6m 정도이며, 잎은 달걀 모양이다. 6월에 흰 꽃이

가지 끝에 두상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취과이다.

목재는 가구의 재료로 쓰고 열매는 식용하며

정원수로 재배한다. 산지의 숲 속에 자란다.

 

  

 

♧ 상강(霜降) 무렵 - 곽진구

 

비온 뒤의

푸른 하늘로부터 알음알음으로 찾아드는

저것이 무엇이냐

이 나무 저 나무 할 것 없이

무너질 듯 반짝거리는 통에 눈부셔 못 보겠다

저 애처로운 몸짓이 끝나면

고요만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을 건 뻔한 일

그 사실을 알면서

시방 나무들은 떼를 지어 몸에 불을 놓은

경건한 이 놀음을 정신없이 해대는구나

 

누구를 위한 소신(燒身)이더냐?

나는 뜻 두고 근엄하게 묻긴 묻는다만

기실 이파리 하나가 타다 질 때마다

이 땅 어딘 가에서

삶에 지친 나 같은 이 하나가

조용히 사라지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렵다, 이승의 불성스런 나날이여

  

  

  

 

♧ 상강(霜降) - 권경업

 

어둠 속 내[川]를 이루던 제 울음 따라

뭇벌레들 떠나간

어제가 상강(霜降)이었습니다

첫눈은 곧 내릴 텐데

가 버린 이들 다시 오지 않아

야윈 어깨 옷깃 여미며 가을이

치밭목을 내려갑니다

 

마른 꽃잎 하나 흔드는 이 없는

이토록 쓸쓸한 배웅을

올해도 나 혼자만이 해야 합니까

 

  

 

♧ 상강 - 백우선

 

들국화를

바라본다

햇살과 바람의

밝고 서늘한 몸짓,

그 얼굴을 본다

그도 나를

마주본다

내 몸을 어루만지는

향기로운 눈길,

눈빛 속에 나부껴 보는

한 꽃송이――

들녘은

맑게 빛나는

꽃밭이다

 

 

  

 

♧ 상강(霜降)무렵 - 정군수

 

내 젊은 날의 서리는

독살스런 얼굴로 초가지붕을 덮었고

지붕보다 더 높은 곳의 나무들을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작은 나의 뜰

어린 꾳봉오리를 무참하게 꺾어버렸다

가을의 절망을 모아다 불태우며

그 서리보다 더 매운 서리가 되어

거만한 오기로 세상을 덮고 싶었던 나

번뜩이는 빛 한 번 밝혀보지 못하고

지명(知命)의 고개를 넘어

고운 단풍 반짝이는 霜降상강무렵

나의 머리는 정말 서리가 되어

세월을 이기고

강물에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거만한 오기는

강 저편에다 모래성을 쌓아 놓고

물 따라 흘러가고

나는 찬 강물에 발을 적시며

霜降상강의 머리를 비워내고 있었다

투명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가벼워지는 나를

빗질하고 있었다

 

  

 

♧ 상강 - 나태주

 

갑자기 눈이 밝아져 귀가 밝아져

마른 풀덤불 속 다리 뻗은 무덤

다시 생각나야 할 때.

따신 햇볕살 익어가는 하이얀 촉루

다시 그리워야 할 때.

 

그대를 잊어버려 아주 뿌리째 잊어버려

세수하고 난 어느 날 아침

수건으로 코피를 닦으며

그대 생각 다시 새롭게 떠올리기 위하여.

 

피 먹은 골짜기 너머

미리 띄워둔 몇 송이 조각구름

빨간 등산복이라도 하나 사서 입혀

멀리 떠나보내고,

 

동산 위 무덤 밖

들국화 같은 것 세워둔 채,

형용사며 부사 따위 벗어둔 채,

명사와 대명사로만 앙상히 누워 있어야 할 때.

 

열일곱 살 처녀귀신

대추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면

우리도 여봐란 듯이

죽어줘야 할 때,

죽어줘야 할 때가 천천히 오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