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가 읽은 시집 속의 시 한 편
* 아웨나무
♧ 두 하종오 씨의 순례 - 상상도 / 하종오
서울 시민 하종오 씨는 걸어서 평양 가고
평양 시민 하종오 씨는 걸어서 서울 간다
두 하종오 씨는 옛 비무장지대에 다다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마주치자
멋쩍어 눈인사하지만 동명이인인 줄 모르고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릴지 서로에게 물은 다음
지방도시 사는 시민이려니 여기고 금세 잊는다
서울 시민 하종오 씨는 처음 밟는 북한 길 걷다가 쉬고
평양 시민 하종오 씨는 처음 밟는 남한 길 걷다가 쉰다
평양에 도착하고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찬찬히
각각 도로 표지판이며 간판 글자며
집 모양새며 옷매무새며 산봉우리며 강줄기며
두 하종오 씨는 낯설어하며 두 눈에 담다가
문득 경건해져서 더욱 찬찬히 걷는다
-- 하종오 시집 ‘남북상징어사전(실천문학 간)’에서
♧ 이인공화국二人共和國 - 허문영
우리들 사이의 빛나는 관계는 얼마나 깊어졌는가요. 우리 둘이서 만든 마당은 얼마나 넓어졌는가요. 드디어 우리는 만천하에 우리의 공화국이 매우 민주적으로 자유롭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기틀을 마련해 왔다고 공포합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한 나라지만 이 공화국이 풍부한 경제적 잠재력까지 가진 작고 매력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모두들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노력해준 당신에게는 세금을 일평생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이 당신에게 쓰는 마지막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더 이상 문자로 표현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아침을 맞기로 하겠습니다.
그대가 헤매며 지나왔던 쓰라린 날들의 절실함만큼 나도 한 남자의 건강함으로 그대의 가슴을 헤아릴 것입니다. 그러면 곧 한 사람의 새로운 국민도 곧 생길 것입니다.
-- 허문영 시집 ‘사랑하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습니다(문화발전 간)’에서
♧ 낙법落法 - 권순진
유도에서 맨 먼저 익혀야할 게 넘어지는 기술이다
자빠지되 물론 상하지 말아야 한다
메칠 생각에 앞서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훈련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지다 보면 바닥과의 화친이 이루어진다
몸의 접점이 많을수록 몸은 안전해지고
나아가 기분 더럽지 않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탁탁 손바닥으로 큰소리 장단 맞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
더러는 보는 이에게도 참 흐뭇하다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은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 권순진 시집 ‘낙법’(문학공원 간)에서
♧ 슬픈 직선 - 김세형
여자여! 미안하다
이제야 네게 고백하마
내가 사랑한 것은 네가 아니었다
네 몸의 곡선일 뿐이었다
내 직선이 잠시 너의 곡선을 꿈꾸다
다시 꼿꼿한 나의 자태로
꺼이~꺼이~ 울며 돌아갔을 뿐이다
넌 내 욕망이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꿈꾸는 곡선이었다
난 슬픈 직선이었다
-- 김세형 시집 ‘찬란을 위하여(황금알 간)’에서
♧ 꽃이 피면 너를 잊겠다 - 한옥순
꽃이 피면
나는 너를 잊어야겠다
청춘의 빛으로 물든 꽃을 보면서
젊은 날 내 흰 치맛자락에
치자꽃빛 노을로 물들이던 너를
기어이 잊어내고야 말겠다
사방천지 흐드러진 꽃에게
내 혼을 던져줄 수 있다면
그때엔 너를 잊을 수 있지 않느냐
모진 겨울 다 이겨냈는데
모진 네 생각쯤이야 다시 못 이기겠느냐
못 이겨내겠느냐 말이다
꽃이 피면, 꽃을 꺾어 놀다보면
너도 나를
나도 너를 반쯤이야 잊어가질 않겠느냐
청춘아, 붉디 붉던 내 청춘아
-- 한옥순 시집 ‘황금빛 주단(원애드 간)’에서
♧ 풋여름 - 정호
안양천 둔치
밤새 물소리와 홀레붙었던 클로버들
잎새마다 땅방울 흥건하다
날이 밝자 입 싹 닦고 꼬리 사려보지만
눈치 빠른 햇살이 닦달한다
화살촉 같은 빛살로 마구 두들겨 팬다
푸르딩딩 잎잎 전신이 멍들었다
한껏 한풀이 해대다 그 간들간들 농염한
허리라인에 훅―
거친 숨바람 내뿜으며 달려든다
잎잎들 쓰러뜨리며 또 한바탕 나뒹군다
세 잎 네 잎 하트무늬 카펫 흥건히
쏟아내는 애액, 저 하얀
꽃반지들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들
-―정호 시집 ‘비닐꽃(북인 간)’에서
♧ 말이 피었다 - 박순옥
세상 속에 제 모습 그려 넣기 위해
지난밤 저 진달래 얼마나 끙끙거렸을까
겨울의 견고한 껍질을 무수히 두드리는 일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부딪치는 일
결국엔 자신에게서 탈출하는 일
그 아픔 견딜 만큼 궁금한 무엇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었던 간곡한 무엇
심장을 움직이고
휘는 허리를 지나 뿌리를 돌아
차가운 물길을 따라 다시 입술까지 올라왔다
그렇게 자신을 빙 돌아 나온 안간힘으로
깊은 겨울 견딘 너를 보이고 싶었구나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었구나
세상에 던지는 연분홍 말이 피었다
-- 박순옥 시집 ‘말이 피었다(우리詩회 간)’에서
♧ 씨를 받다 - 구순희
잊어버린 분꽃이 피었다
항상 붉다고 믿었던 꽃은
갈아입은 시간만큼이나 알록달록했다
바람은 여태 누구를 기다렸던지
뒤늦게 피고 성급한 열매가 익었다
붉고 검은 구호만 가득한
후줄근한 뒷골목 허벅지쯤에서
아무도 몰래 분꽃 씨만 받았다
꽃은 노랗거나 붉기만 한데
열매는 왜 자꾸 까맣게 속이 타는지
꽃의 아이를 조심조심 받았다
몇몇은 실수로 땅에 묻히기도 했다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지
산부인과 병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 구순희 시집 ‘내려놓지마(시산맥 간)’에서
♧ 틈 - 김선호
팔랑거리는 나비의 한쪽 날개가 다쳐 있다
맑은 유리 통해
푸른 하늘을 보았겠지
살짝 살짝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꽃바람인 줄 알고 덤볐을거야
번번이 떨어지는 입사원서 내고
돌아서는데
나비 한 마리가
빌딩 창에 비친 제 모습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절뚝거리며 날아가고 있다
-- 김선호 시집 ‘햇살 마름질(서정시학 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