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사철나무 열매에 사랑이

김창집 2011. 12. 21. 09:35

 

기온이 급강하로 사방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도

저 사철나무 열매처럼 따뜻한 온기가 훈훈하다.

12년째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추운 아침

뉴스로 접하며,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사철나무는 노박덩굴과(科)에 속한 상록 관목으로.

잎은 두껍고 녹색의 윤이 나며, 여름에는 녹백색의

잔꽃이 피고, 가을에 붉고 둥근 열매가 익는다.

정원수나 울타리 등으로 쓰이며 나무껍질은 약으로

쓰인다. 눈 덮인 견월악을 돌아 나오다 한라생태숲에서

눈을 쓴 채로 열매를 달고 있는 사철나무를 만났다.

 

 

♧ 울타리 사철나무 - 오하룡

 

너희는 지금 촘촘히 몸 붙여

집총 자세로 어쩌면 저 중세의

잘 훈련된 충실한 병정 같이

어느 집 울타리 되어있다

누구의 지엄한 명령이었는지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저 제국시대

마지막 잔재라면 설명이 될까

아무튼 구령소리 진동할 것 같은

혈기 팽만한 군홧발 자세로

열심히 발이라도 맞추는지

고분고분 밤낮도 없이 숨죽인 채

몇 년째 지켜봐도 그 자리건만

가는 곳 어디인지 목적지나 알랴

 

 

♧ 부질없는 사랑 - 박정순

 

남루한 내 마음을 탓하느라

눈부신 햇살의 아름다움을 잊고

터널속의 어둠만을 바라보았다

사시 사철 녹색 푸른 잎

드러내는 사철나무의 타고난 심성을

철마다 색깔 바뀌는 단풍나무가 어이 알리오

부질없이 쓴 시 한편을 책상위에 놓고서

깊은 산골짝의 맑은 옹달샘물이 되고 싶다고

목소리 고운 새소리가 되고 싶다고

혼자서 쌓았다 무너뜨리고 마는

모래탑 사랑처럼

서산 하늘에 걸려 붉디 붉어지는데

팽팽한 바람의 화살이 달려간다

 

 

♧ 겨울 하늘길 - 한승필

 

겨울에는

겨울로 휘몰리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삶의 불씨를 찾아 헤매는

빙판길 나들이는 곡예같지만

그 어떤 날에도 얼지 않은 하늘길을

겨울새는 날고

숲은 지금 뿌리 속 혈관들이 잠들어 있다

다정한 연인처럼 겨울해와 팔장 낀 사철나무만이

푸른 가지손을 하늘품에 깊이 찔러 녹이고

 

노을진 하늘 가 자투리 벤치에 걸터 앉아

겨울허파로 숨쉬는 사람들은

초저녁 어스름에 하늘길을 산책한다

순간, 반디처럼 떠오른 잔별들

함지박만한 달도 떠올라 있었네

밤하늘이 깔아놓은 겨울이불속으로

다들, 어디선가

종종절음치며 돌아오고 있겠네

 

 

♧ 시인의 오두막 - 채홍조

 

하늘 모퉁이 돌아서면

바람의 숨결마저 향기롭다

반기며 뛰어오르는

메뚜기 여치 개구리,

매미들의 합창소리

고추잠자리 군무가 우아하다

 

황토 흙으로

조그마한 오두막 지어

사철나무 빙 둘러 울타리치고

큰 은행나무 하나 보초 세워

아치형 대문에는 포도덩굴을 올려줘야지

 

그 옆에 작은 연못, 수영하는 비단잉어

연꽃 피어 향기로우면

구름 몇 장 띄워두고

소나무 벤치에 쉬어가는 바람

하우스 속에 허브와 분재들의

다정하고 고운 이야기소리 들려오겠지

 

나를 아는 여러 문우님

가슴 시려 고향으로 바람부는 날

언제든지 찾아와 깃들다 가시구려

무공해 채소 뜯고 과일 몇 개 따

솔잎 주 한잔 기울이면서

자연과 시와 인생을 이야기하며

한밤을 밝혀도 넉넉하고 푸근하리

 

 

♧ 몇 개의 바다를 지나서 - 권태원

1

 

저무는

바다의 주름살

위로 날으는 물새 한 마리,

소금기를 지우며 돌아온다

 

어등(漁燈)을 밝히면

저녁 바다는 헌옷을 벗고

여기 저기서 떠오르는

영혼의 고기떼,

파도는 조금씩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다

 

돌아보면

숲 속의 가랑잎 소리

한 마리 짐승이 길을 잃고 있다

 

 

2

 

간 밤에

잠든 것들의 이름을 부르며

깊은 바다 밑으로 내려갔다

캄캄한 안개 속

다시 가라앉는 바다의 중심

죽은 시간의 어둠이 되어

가장 단단한 절망을 캐어 내었다

 

때로는 암초를 지나서

아내의 젖꼭지같은 섬을 만났다

보이는 것은 허무의 바다,

지칠 줄 모르는

우리의 노동은 떠돌고 있었다

 

오, 밤마다

거대한 잎으로 흔들리는 바다

바다에 오면

우리의 입술은 젖어 있었다

 

시간의 바다 속으로

아득히 고향이 보이고

구리빛 손바닥 끝에

진한 소금기를 남기며

유년의 바다는 밀려가고 있었다

 

     

3

 

사철나무 사이사이

게 한 마리가

쉴새없이 모래톱을 쌓고 있다

 

잡목림 너머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생각한다

어머니의 기도는 바다를 건너

더욱 깊이 내 잠 속으로 온다

 

바다로 떠난 사내들을 위하여

바다 여인들이 손금을 말리고 있다

 

우리들의 슬픔이 만리 밖에서 흔들리고

싸움이 끝난 마르지 않는 바다에

밤새 소리는 쌓이지 않는다

 

밤마다 꿈꾸는 꿈자리에

밀려오는 갯벌,

몇 개의 바다를 지나서

마침내 깊이 깊이 새로운 길이 열린다

 

     

4

 

물새의

한 쪽 날개 끝으로 기우는 바다

 

아이들은 그 바다를

도화지에 그리고 있다

 

가장

큰 바다는

조개 껍질 속에

저 혼자

웅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