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초대시조와 다정큼나무

김창집 2011. 12. 31. 00:25

 

‘제주시조’ 제19집을 보내왔다.

감사 드리며 먼저 초대시조 8편을 골라

이호해변 겨울 찬 바닷바람에도

영롱한 빛을 잃지 않은

다정큼나무 열매와 같이 올린다.

 

다정큼나무는 장미과에 속한 상록 관목으로

활엽수이며 잎은 어긋나고, 여름에 흰 꽃이

원추 꽃차례로 핀다. 열매는 둥글며 가을에

검게 익는다. 제주 해안에서도 자생한다.

 

 

♧ 봄, 별리別離 - 박시교

 

저만치 앞서 가는 세월의 그림자를

일부러 놓아버리고 서성이는 봄날 한때

눈부신 아기초록에 마음 잠시 기대본다

무얼까, 삶의 길목마다 내가 잃은 것은

자꾸만 뒤가 허전하여 버릇처럼 돌아보며

그 먼 길 처음 설렘으로 너를 또 기다린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헤어짐의 아픈 되풀이

아니면 오랜 기다림 끝에 돌로 굳어버린 꿈

그 상처 홀로 꿰매는 고통인지도 모른다

 

 

♧ 독법(讀法) - 박시교

 

산이라 써 놓고 높다 라고 읽는다

하늘이라 써 놓고 드높다 라고 읽는다

한 사람

그 사람 이름 써 놓고 되뇌는 말

……그립다

 

 

♧ 오래된 슬픔 - 김영재

     --우이령

 

오래된 슬픔은 왜 눈물이 없는가

잘못 든 끼니처럼 명치에 걸리는가

척추를 타고 오르며 휘청이게 하는가

 

 

♧ 꺾다 - 김영재

 

꺾어, 꺾어 먹어라 꺾어서 마셔야지

술 마실 때 친구가 넌지시 흘린 멘트

노래도 꺾는 맛이야! 한 소절 꺾어 넘기네

꺾고 꺾으며 두 번 세 번 꺾이며

꺾을수록 신이 나는 꺾일수록 낭창거리는

노래야 그렇다 치고 사는 게 안 그렇겠느냐

 

 

♧ 신발 - 김일연

 

싸릿재 고갯마루 화절령 하늘길을

 

바람으로 노래로 떠도는 마음 말고

 

닳도록

흐르는 것에

 

신발

 

 

♧ 어제오늘내일

 

모눈모눈모눈모눈

모눈모눈모눈모눈

 

그러나 그 안에는

바람과 구름의 세월과

 

모눈이 터질 것 같은

 

미친

목마름

 

 

♧ 가을 송림사 - 박현덕

 

물이 끓는 가을 한낮 선방禪房에 꿇어앉아

어젯밤 잠결 같은 물소리도 우려낸다

소복이 다기에 잠긴 구절초 한 무더기

 

오층 전탑 키로 자란 은행나무 물들 무렵

바람 부는 가지 쪽이 조금씩 여위더니

마침내 현기증인가, 잎사귀들 노랗다

한 땀씩 수를 놓듯 절 마당에 깔린 낙엽

이승의 서러움은 일다경一茶頃만 내려놓고

마음을 닦으라 하네 백지로 깔린 하늘

 

 

♧ 만장굴 - 권영오

 

출렁이는 공복을 안고 활보하는

대체 누가 텅빈 뱃속을 채울 것인가

 

바람의 내장을 보았듯

병력病歷을 다 읽고 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