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조와 다정큼나무
‘제주시조’ 제19집을 보내왔다.
감사 드리며 먼저 초대시조 8편을 골라
이호해변 겨울 찬 바닷바람에도
영롱한 빛을 잃지 않은
다정큼나무 열매와 같이 올린다.
다정큼나무는 장미과에 속한 상록 관목으로
활엽수이며 잎은 어긋나고, 여름에 흰 꽃이
원추 꽃차례로 핀다. 열매는 둥글며 가을에
검게 익는다. 제주 해안에서도 자생한다.
♧ 봄, 별리別離 - 박시교
저만치 앞서 가는 세월의 그림자를
일부러 놓아버리고 서성이는 봄날 한때
눈부신 아기초록에 마음 잠시 기대본다
무얼까, 삶의 길목마다 내가 잃은 것은
자꾸만 뒤가 허전하여 버릇처럼 돌아보며
그 먼 길 처음 설렘으로 너를 또 기다린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헤어짐의 아픈 되풀이
아니면 오랜 기다림 끝에 돌로 굳어버린 꿈
그 상처 홀로 꿰매는 고통인지도 모른다
♧ 독법(讀法) - 박시교
산이라 써 놓고 높다 라고 읽는다
하늘이라 써 놓고 드높다 라고 읽는다
한 사람
그 사람 이름 써 놓고 되뇌는 말
……그립다
♧ 오래된 슬픔 - 김영재
--우이령
오래된 슬픔은 왜 눈물이 없는가
잘못 든 끼니처럼 명치에 걸리는가
척추를 타고 오르며 휘청이게 하는가
♧ 꺾다 - 김영재
꺾어, 꺾어 먹어라 꺾어서 마셔야지
술 마실 때 친구가 넌지시 흘린 멘트
노래도 꺾는 맛이야! 한 소절 꺾어 넘기네
꺾고 꺾으며 두 번 세 번 꺾이며
꺾을수록 신이 나는 꺾일수록 낭창거리는
노래야 그렇다 치고 사는 게 안 그렇겠느냐
♧ 신발 - 김일연
싸릿재 고갯마루 화절령 하늘길을
바람으로 노래로 떠도는 마음 말고
닳도록
흐르는 것에
물
삶
신발
♧ 어제오늘내일
모눈모눈모눈모눈
모눈모눈모눈모눈
그러나 그 안에는
바람과 구름의 세월과
모눈이 터질 것 같은
미친
목마름
♧ 가을 송림사 - 박현덕
물이 끓는 가을 한낮 선방禪房에 꿇어앉아
어젯밤 잠결 같은 물소리도 우려낸다
소복이 다기에 잠긴 구절초 한 무더기
오층 전탑 키로 자란 은행나무 물들 무렵
바람 부는 가지 쪽이 조금씩 여위더니
마침내 현기증인가, 잎사귀들 노랗다
한 땀씩 수를 놓듯 절 마당에 깔린 낙엽
이승의 서러움은 일다경一茶頃만 내려놓고
마음을 닦으라 하네 백지로 깔린 하늘
♧ 만장굴 - 권영오
출렁이는 공복을 안고 활보하는
대체 누가 텅빈 뱃속을 채울 것인가
바람의 내장을 보았듯
병력病歷을 다 읽고 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