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마을을 지나며
글발글발 릴레이 제주 걷기 사흘째,
오전에 금능 일성콘도에서 고산농협까지 걷는데,
얼마 안 있어 선인장 마을이 나온다.
차디찬 겨울 하늬바람이 소금끼를 동반하고
곧바로 내리치는 바람코지의 빌레 트멍(틈)에건
자갈밭이건 가리지 않고 들이 차 열매를 맺은
손바닥선인장.
어느 열대 지역 바닷가에서 태풍에 찢기어 바다로 날려
둥둥 떠다니다가, 쿠르시오 해류에 실려 둥둥 떠다니다가
하늬바람 부는 오늘 같은 날 육지로 떠올라
강한 생명력으로 뿌리를 내리고 종자를 퍼뜨린
손바닥 선인장.
오전 걷기를 끝내고 차를 몰러 출발점으로 온 뒤
다시 되돌아가 이들을 보며, 강정주민들을 생각했다.
2007년 4월26일부터 지금까지 고향마을과 자연을
지키려 가시를 세우고 지 엄청난 힘과 맞서온
선인장 같은 그들, 조그만 힘이지만 보태고 싶다.
♧ 강정리 바다에서 - 김광렬
그가 막사발에 담긴 통김치를
여러 가닥으로 좍좍 찢어서 주는 것은
이처럼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저 단순한 정감의 표현인가
부엌칼로 보기 좋게 자박자박 썰지 않고
손으로 좍좍 찢어 먹는
김치의 그 깊은 속맛, 그 온정이
못 견디게 가슴 안으로 스며드는데
그러면서 우리가 저처럼
찢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더불어 깨닫는데
김치여, 생살 찢겨서
아픔과 황홀함을 동시에 주는 김치여
강정 앞 바다가 너희처럼
찢겨나갈 것을 생각하면
참담하다, 방금 찢어낸 김치 여기에 없듯이
저 고운 풍경들도 곧 지워져버리겠지
사라진 뒤 누가 다시
정겨운 옛 모습으로 되살릴까?
♧ 붉은발말똥게야 - 강봉수
붉은발말똥게야
너는 잘 있느냐.
평화 실은 버스도
평화 실은 비행기도
도로를 달리지 못하고
하늘을 날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
길이 막히고 하늘이 잠겨
너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어야한다.
살아서 기다려야 한다.
우리 다시 만나는 꿈을 꾸며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
너를 향한 걸음만은 아무도 막을 수 없으니
짚신을 신고서라도
너의 자유와 평화와
구럼비 너른 바위 그 생명 터를 향해
날마다 한발 한발 다가 갈 터이니
중덕바당 내주지 말고
살아만 있어다오.
♧ 선인장 - 김경숙
목마르다 고백하지 못한
단단한 침묵
끝끝내
제 몸에 비수로 꽂혀
평생 안고 살아가는
메말라버린 눈물샘
찾아 헤매는 오아시스
그 곳은 어디...
♧ 선인장 가시 - 오경택
무슨 억한 감정이 저리도 모질어
안으로만 콱-꽉- 채워진 분노가
뾰족한 침으로
마음까지 찌르고야 마는
여기저기 할퀴어져
조각나고 구겨진 마음속을
훑고 지나가는 뼈아픈 기억들 때문인가
시퍼런 역린逆鱗으로 되살아나는
옹색한 속내
닫쳐진 빗장 풀어 헤치고
파릇파릇 연초록 순으로 돌아가자
너,
본생은 여린 잎새였지 않았던가!
♧ 그대 떠난 사막엔 선인장이 자라고 - 강수
그대 보낸 뒤
아직도 읽지 못한 책의 눈빛이 슬프다.
슬픔은 내 갈비뼈 사이 쿤룬산맥에서 푸르게 빛나고
그 산맥 아래서 옷을 벗고 누운 사막의 눈빛이 젖어있다.
슬픔의 오아시스엔 선인장 하나
그 위에 앉은 새의 가슴엔 온통 푸른 슬픔
새는 날아가 버리고
선인장의 잘 여문 가시가 지나가는 바람의 가슴을 긁는다.
사막을 건너기 위해 사막에서 죽어간 수많은 새들을
헤아릴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멀리 타림강(江) 가, 새 발자국이 젖어 있다.
선인장은 새에 대해 안타까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선인장 가시는 슬픈 초록색이라서 슬프다.
♧ 겨울 선인장 - 이향아
그통에도 애를 가졌구나
애 낳고 몸조리도 못했겠구나
냉골 바닥 어긋난 뼈 육천 육백 마디가
무너졌겠구나, 골병 들었겠구나
한 겨운 냉골 바닥 돌아앉은 구석에서
얼어붙은 창자 속을 뒤집어 보이듯이
이게 다야,
이젠 아무 것도 없어
시뻘겋게 소리치는 게발 선인장
핏발 선 눈이 날 쏘아 보는구나
쏘아보듯 눈 흘기다 정신을 잃었구나
방 안에 들여 놓고 열적게 바라보면
두려워라 빈민 구호
기진맥진 네게 손을 뻗으면
잔혹하여라
천벌이 무서운 자성의 시간
♧ 아버지의 가시선인장 - 진태숙
가시선인장이 털썩 누워버린다
청빛 가시도 흙물을 뒤집어썼다
스치기만 하여도 생채기를 내는 가시였다
어찌나 사납던지 늘 멀찌감치 두어야 했다
자못, 물을 줄 수 있는 거리를 넘어서면
여지없이 찔렀다
핏줄 깊숙이 박혀버리고
잘려나간 자리엔 더 단단한 가시를 들고 나왔다
제 살을 찔려본 식구들은 서로 물 주기를 꺼렸다
나도 호되게 찔린 날부터
쑤시고 곪은 날만큼
물주기를 그만두었다
쏟아진 선인장 밑둥치의 말라버린 뿌리를 보듬듯
아버지의 손을 쥐었다
푸른 심줄의 굴곡 아래
꼿꼿이 가시를 키우던 아버지의 힘이 따뜻했다
뒤늦은 나의 물주기를 탓하지도 않는데,
무엇이 날 뜨겁게 쑤셔댄다
♧ 강정을 지난다 - 정군칠
밤에 인적 없는 강정을 지난다
파도는 노란 깃발이 꽂혀 있는
처마까지 따라와
외삼촌 없는 외가 같은 적요 속
범섬과 문섬의 속울음을 풀어놓는다
낮에는 황건 같은 노란 깃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는데
어두워지며 찢기는 소리만 남아 펄럭인다
어쩌지 못해
순한 바람이 되어버리니
서로를 캄캄히 가두려
올레 담이 높아지고
마을의 집들은 서로 다른 깃발을 내걸었다
다른 바람이 어디 있었던가
남들은 화산섬이라 하지만
물 좋아 기름진 땅
바닷바람마저 범섬과 문섬을 지나며
가장 부드러운 숨결로 길들여지던 곳
나팔고동과 진홍나팔돌산호가
목숨 다해 파도를 순하게 다스리던
그곳,
- 江汀이라는 말 그저 나온 말 아니지
내게도 오래 묵혀 둔 말이 있었으니
그대를 마주하고 싶다는 것
그대의 가난한 무릎을 빌려
무거운 내 머리 잠시나마 얹히고 싶다는 것
하지만 나의 비애는
뒹구는 빈 소라껍질처럼, 무너진 방파제처럼
속절없다
거대한 이지스함에 떠밀릴 낡은 어선 몇 척이
던져진 듯 놓여 있는,
쉬 바닥까지 드러낸 옴팡진 포구와
벼랑으로 내몰린 노란 깃발과
낯이 맑던 바다까지 검게 변해 버린 강정
도둑게가 훔칠 그 껍질처럼
속이 텅텅 비어가는 집들
그림자만 남은
강정, 그 마을을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