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눈꽃인들 꽃이 아니랴

김창집 2012. 2. 19. 08:32

 

오름 산행이 약속되어 있던 어제

밤새 내린 늦은 눈으로 길이 얼어

몇 십 분을 기다려 택시를 겨우 얻어 타고 가는데

길이 막혀서 걷는 것이 더 낫겠다는 기사의 말을 듣고

걸어서 약속시간 십 분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계획된 오름은 차를 접근시킬 수 없어 못 가고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른 오름에 가기로 했다.

버스터미널로 가서

번영로를 거쳐 표선으로 가는 차를 타고 가다가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으로 들어가는

선흘2리 주차장에 내려 그 남쪽에 있는

부대악과 부소악에 올랐다.

 

능선에는 모진 겨울바람을 타고 날아든 눈이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감싼 모습이

꼭 이른 봄에 핀 하얀 꽃같이 느껴졌다.

눈이 휘날리는 벌판을 지나 이르는 능선마다

피어난 눈꽃들을 보며 탄성을 지른다.

어쩌면 바다 속 산호 숲을 거니는 것 같은 착각이….

 

 

 

♧ 추억의 눈꽃 - (宵火)고은영

 

그리움으로 내리던 눈의 추억이

유독 올 겨울엔 환합니다

생인손 앓듯 시시때때로

눈물로 멍울 지던 추억을 마주하면

 

떠나간 것들의 안부엔

건조한 바람 냄새 휘돌아 내리고

절망이 비둘기호 열차처럼 온 밤을 덜컹대며

끝없이 어둠의 선로를 달리던 길

 

내내 환희를 줏어 들창을 밝히던 눈꽃들이

까마귀 쪽 나무에 소복하던 고향 어귀

일출봉은 종일 푸른 파도를 읽고

눈꽃들이 하얀 여백을 그려 넣던 골목마다

까막눈이 아이들이 나무 팽이를 돌리고

 

눈만 쌓이면 세상모르게 좋아라. 웃던

소싯적 까마득한 웃음소리들이

우울하고 시무룩해진 얼굴에

까르르 하늘하늘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 눈꽃자리 - 박종영

 

산과 들에

저토록 외로운 황천(荒天)의 길을 덮고,

또 다른 이승의 길 만들어 차가운 세월을

마중하는 눈발,

 

폴폴 흘러다니는 순백의 무계(無計),

그 미량의 속삭임이

가느다란 눈물로 안길 때마다,

땅은 극명한 웃음을 감추며 입맞춤이다

 

들리는 듯 새록새록 가벼운 신음소리

백색의 여인과 우직한 땅의 교접을 엿듣는 우리,

낯선 그리움으로 청춘이 콩콩거리고

 

뽀드득 아프게 잉태되는 발자국,

지나간 흔적마다

가벼운 생명의 안간힘으로 피어나는 눈꽃자리  

 

 

 

♧ 눈꽃 - 류정환

 

너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눈에도 꽃이 핀다.

 

어디 내 눈 뿐이랴.

나무도 산도 온통

너로 하여 꽃이다.

 

그러나 눈물겨운 꽃이여!

나는 짐짓 찬바람인 듯

이만큼 서서 바라볼 뿐이다.

 

만지면 허공에 흩어질까

더운 가슴으로 안으면

눈물이 될까 저어하여

 

등산로 길섶 나무 뒤에 숨어

두 눈 가득 꽃을 담아 갈 뿐이다.

 

 

♧ 눈꽃 - 홍수희

 

나 그렇게 되었으면,

 

네 마음이 외로울 때에

겨울 창문을 열면

잎 떨어진 가지 위에 피어난

하얀 눈꽃이 되었으면

 

나 그렇게 되었으면,

 

네 가는 길 고달프고 힘겨울 때에

내가 앞서 잠시 반짝이다가

구태여 그 자리 주저앉지 않고

햇빛에 사르르 녹아도 좋은

 

나 그렇게 되었으면,

 

그대 가다가 넘어질 때에

넘어진 바로 당신의 무릎 앞으로

우연인 듯 내려앉은 눈부신 미소

 

나 그렇게 되었으면,

 

당신이 눈물로 봄을 기다릴 적에

나 먼저 겨울 동산에 녹아

하롱하롱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로

 

………

아, 나 눈꽃이 되었으면  

 

 

 

♧ 눈꽃을 보며 - 김여정

 

오대산 월정사 간 날에

나를 제일 반갑게 맞아 빛나는 자비의 미소 보내준

눈꽃, 푸른 나무가지들 위에 점점이 피어난

해탈의 꽃

그렇다. 분명 해탈의 꽃이었다.

하얗게 표백된 무욕(無慾)의 꽃

그 순백의 설법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

벗어나야지 벗어나야지 하면서

다짐하면 할수록 더욱 발목 잡히는

미련함이여 어리석음이

나를 참 많이도 부끄럽게 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가는 길에

언뜻 언뜻 찬손으로 내 달아오른 부끄러움 식혀주는

투명한 계곡물 소리

어디선가 들여오는 저 새 소리

 

사람들은 적멸보궁을 못보고 간다고 아쉬워 했다.

시간이 얼마쯤 흐르고 나면

조용히 스러질 저 눈꽃이

다름 아닌 적멸보궁인 것을 누가 알랴.

 

그날 나는 늠름히 자란 적송(赤松)푸른 가지 위의

눈꽃 속에 적멸보궁 하나를 몰래 지어놓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