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 수줍게 피었네
올해는 제주에도 이상난동(異常暖冬)이 없어
모든 봄꽃이 늦으리라 예상하고
바쁜 핑계로 한림공원을 안 찾았으나
아침에는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모든 일을 대충 마치고 찾아가보니
분재 화분에 하나에는 백매(白梅)가
수십 송이는 됨직하고
한 화분에는 홍매(紅梅)가 십여 송이 피었는데
다른 화분은 이제야 봉오리에 물이 올라
일주일은 기다려야 만개하겠다.
매화와 수선화를 심어놓은 밭에 가보니
백매는 두 나무에, 홍매는 한 나무에
그런 대로 볼만하여 발돋음 하며 찍었다.
일찍 피는 장수매는 쬐그맣게 두세 송이
괴불나무도 꼭 한 송이
영춘화도 대여섯 송이밖에 안 피었다.
♧ 홍매화 짙던 날 - 원성
하늘빛이 나무에 걸려 웃고 있는데
먼 길가에선 새싹들이 손짓하는데
하나하나 떨어지는 꽃잎은
서글픈 내 마음에 와 아련한 눈물 되네.
내 눈에는 봄이 깊어만 가는데
고운님은 저만치 내달려가는데
흩날리는 꽃잎 땅 위에 피어
철없는 아지랑이 꽃길 따라 춤을 추네.
하루가 또 하루가 저물어 가는데
지워야 할 엄마 얼굴 떠오르는데
나뭇가지엔 붉은 홍매화
아련한 기억들이 망울져 울고 있네.
아무리 말을 건네 보아도
아무리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스님은 아무 말씀 없으시네.
에타는 내 마음을 아무도 모른다네.
홍매화빛 저리도 짙어 가는데...
♧ 홍매화가 피는 아침 - 주용일
내 그리움은 꿈길이 닳도록
깊고도 서럽구나
그대 그리움으로
밤새 뒤척인 아침에는
우물가에 어김없이
붉은 매화가 핀다
꿈속 먼 길을 돌아온
내 가슴의 고단한 동토에서
각혈의 꽃송이
수없이 밀고 밀어 올리는 매화나무야
밤새 고생 많았다
순식간에 활짝 피어서
세숫대야 가득 핏물 들이는
홍매화 나무의 꽃송이들아
그리움은 꽃처럼 붉은 것인가
눈물 몇 방울 잘 섞어
꽃물에 세수하고 바라보는
시린 하늘에도 꽃잎 흩날리는구나
♧ 홍매 - 장덕천
세상을 붉은빛으로 채운다
추위에 떨며 기다려온 날들
싱그러운 햇살과
푸른 바람으로 가득 찬
세상이 너무 좋아서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다
매화꽃 속눈을 들여다보며
꽃잎의 작은 눈물이
꽃눈에 머물다가
햇빛을 보면 따스한 가슴으로 껴안고
어둠이 오면 어둠으로 잠을 자다가
점점이 박히는 고통으로
작은 씨앗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
♧ 노루목에 핀 홍매화 - 이민숙
비켜 간 노을
강 노루목에 젖고
흘러 흘러든 물살
허리 터는 나루터
물 눈 팔짝 튀어 오른다
꽃물에 얼굴 씻고
이슬 귀 엮어 목에 건
연지곤지 찍어 단장한
홍조 띤 홍매화 곱기도 하다
올망졸망
만개하고 싶어
곰실곰실 주리를 튼다
분홍치마 저고리
옷고름 날리는 여인처럼
아름드리 핀
홍매화 꽃잎 문다
말간 햇살에 누워
수혈하는 붉은 꽃술
꽃물 돌아 곱게도 흐른다
♧ 홍매화 고운 화심 - 심의표
찬바람 대지를 휘감아도
연분홍 꽃잎은 피리니
응달진 뒤란의 잔설을
그림자로 거느리고
겨우내 아릿했던 해묵은 얘기
나무 끝에 걸어 놓고
마른 가슴 촉촉이 씻어
살포시 어루는 임의 입김
야트막한 담장 한 켠
햇살 한껏 끌어안고
봄을 향한 그리움에
비켜가는 햇살 낚아
홍매화 고운 화심
허공중에 그려내면
종다리 지저귀는 봄노래에
화사하고 향 그리운 꽃눈 열어
투욱 툭
꽃망울 터뜨리는 소리
분홍빛 연정 새봄을 부르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