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눈 속에 있다 - 송문헌 시집
♧ 시인의 말
근년에 써놓은 시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흡족한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봄, 어느 분이 건네주는 17번째 시집을 받아들고 막걸리 잔을 나누며 ‘나도 시집을 엮어야 하는데 시들이 부실하여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이 일도 어차피 기록 아닌가?” 하신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부끄럽지만 다섯 번째 시집으로 엮기로 한다. (중략)
그 날 정중히 종이컵에 막걸리 한 잔 따라드리는 것으로 값(?)을 치르고 염치없이 그렇게 내 아호를 받았다. 그리고 쑥스럽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시집에 ‘阿星’ 문패를 걸어본다. 海里 형님, 고맙습니다.
2010년 9월 송문헌
♧ 동안거에 들다
어디가 꽃길이고 어디가 낙엽자리인가
바스락 우두둑 바람에 골절되는 가랑잎들
고요의 뼈를 들추는 경계를 지운 산
나를 불러들이고 허둥지둥 지나온 길
돌아가는 길 또한 오리무중
누가 누구의 길을 동행하고
누가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네가 내게 마음이 없으면 오지 않을 터
내가 네게 길이 없으면 가지 못할
눈을 뜨면 어느새 산빛 풀빛 본연의 모습
전광석화 번쩍 오가는 시간의 화살도 잠시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네, 그렇게 낡아 사라지네
사람들아, 참선 중인 저 산 고요 깨우지 마라
♧ 초승달 바다에
누구의 한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가
만나고 헤어지는
일체의 관계들이 정지된 채
어둠 속 텅 빈 바다는 어느
시간의 변방에 앉아 웅얼웅얼
먼 먼 뱃길 항로를 밝혀 들고
유리(遊離)의 초승달이 저 홀로 쓸쓸히
마라도 밤바다에 빈 길을 내고 있네
♧ 이어도
(추석 연휴 때인 2006년 10월 5일 ‘외로움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다섯 장의 유서와 함께 택시운전을 하며 평생 고아로 살아온 쉰두 살 정 모 씨는 제주의 자기 집 문고리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다. 2005년 3월 달력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2006년 10월 5일 발견 되었으니 19개월 만에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나 이제 훨훨 날아가렵니다
바닷바람을 날리며
삼월
내겐 아직 떠나지 않는 겨울이 머무는데
더는 추위를 견뎌낼 재간이 없어 남루한 생애
단거리 옷 벗어 문고리에 걸어두고
겨울 시간들 모두 두고, 이젠 떠나렵니다
성산포 해오름
아침 햇살이 택시 창유리에 볼 부비든 그리운 바다
갯마을 아주망도 잊으렵니다
홀가분하게 바다하늘을 날아
아지 못할 먼먼 고향, 찾아 갑니다
산발치 양철지붕 아래 뛰놀던 망아지도
어느 밭둑 아래 쑥대머리를 하고 누워계실
부모님 산소도 이제 찾아보렵니다
홀로 오십이 년
흰 종이 다섯 장에 묘비명 새겨두고
차가운 3월 달력 하나 덤으로 걸어둔 채
제주바다 이어도 내 길을 찾아 떠나갑니다
아아 열아홉 달만의 외출,
이 어둡고 화안한 자유
♧ 그냥 놔둘 일이다
흐르는 대로 놔둘 일이다
태초에 길 떠나 쉼 없이 흘러 흘러서
외지고 낮은 곳으로만 찾아들어
목마른 이 갈증 풀고 씻겨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는 강물
가르고 막아 동과 서로 나누면
나누어 가두고 숨 막히게
세상 오물 폐기름으로 뒤섞어
숨통 조이면, 무엇을 자백 할까
흘러야 살아 숨 쉬는 세상 만물은
강은 쉬지 않고 흘러야 강이다
높낮음 없이 휘돌아 모진 이
보듬고 달래, 함께 달려가는 길
영원에서 순간으로 흐르는 강물
그냥 그렇게 놔둘 일이다
♧ 그녀를 만나면 그 숲으로 가리라
찔레 고광나무 비목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 꽃내, 꽃네, “그년을 만나면 이 숲으로 오리라, 이 숲으로 오리라!” 옆에서 걷던 소설가 k는 하늘을 우러르며 종주먹댄다 지리산 휴양림 유월이 신새벽 산내음에 넋 놓고 빠져 든다
계수나무 박달나무 쪽동백 틈 새 산목련꽃 속살이 희디희다 물푸레 자작나무 무릎 아래 삼단 같은 올동백 어깨를 짚고 하품 하던 잠꾸러기 자귀나무 아랫도리에 부르르 힘이 뻗친다 언뜻언뜻 나뭇잎 사이 하늘강물이 후~ 가슴을 열어젖힌다
눈을 감고 오감을 열어 놓는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결에 살가운 소리 살그락 살그락 풀잎 나뭇잎들 힘이 넘쳐 힘에 겨워 어화둥둥, 딱새 산솔새 동박새 노랑때까치 직박구리, 솰솰솰솰 그녀를 만나면 물소리 그 숲으로 가리
♧ 사랑의 계산법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이라 하네
그래도 자꾸만 커가기만 하네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마르지 않은 샘이라 하네 그것은
신명나는 흥풀이라네
이 세상, 사는 일은
♧ 겨울산 - 2
굽이굽이 오르내리던 산마루
산정마다
함께 했던 이 누구던가
함께 할 이 또 누구인가
멀고도 가깝구나
걸음걸음 힘겹게 건너온 갑년의 시간들
한겨울 오늘 너는 빈 산 홀로이구나
♧ 그리운 것은 눈 속에 있다
-- 폭설ㆍ4
산말랭이 어디쯤서 길을 잃었더냐
전선 어느 곳에서 허리 잘리는 아픔을 만났느냐
한낮에도 얼어붙는 동짓달 늦은 밤 눈포래
잠 못 이루는 하늘가 네 아픔을 묻고 있느냐
벌써 보름째 눈은 내려 쌓이는데 하필이면
이 한 겨울 너는 지금 길 없는 길을 나서
아무 말 없이
퍼붓는 눈발에게 길을 묻고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