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림문학 20호와 매화
오현고 동문 문학인의 모임인 귤림문학회에서
‘귤림문학’ 2011년 통권 제20호가 나왔다.
특집1은 ‘내 문학 속의 오현단’
특집2는 ‘귤림문학’ 20호를 맞이하여
그 외 스물세 분 시인의 시와
두 분의 소설 아홉 분의 수필이 실렸다.
그 중 시 몇 편을 골라
지난 월요일 한림공원에서 찍은 매화와 같이 올린다.
♧ 앞으로 10년은 - 문충성
내 친구 성종이가 말하기를
우리 나이쯤 되면 먹을 것에 고민하지 말라고
고희 넘겼으면 본전은 된 것이니
덤으로 사는 삶에 너무 욕심 주지 말라고
먹고 싶을 때 먹을 것 먹고
병들어도 앞으로 10년은 넉넉하게 살 것이니
즐겨 마시던 커피도 안 마시고
그 맛있는 도새기 고기, 쇠고기도 안 먹고
한잔 하면 돌고 도는
물레방아 백수가 꿈꾸는
백수(白壽) 은은히 밝아오는 술도 끊고
그러면 세상사는 맛 다 잃어버리니
힘 있을 때 잘 먹고 즐겁게 살라고
한다 앞으로 10년은 넉넉하게 살 것이니
병들어도 10년은
♧ 산방산 - 문태길
산에 오르면
나는 남이 된다
나 이전의 내가 되거나
나 이후의 내가 되기도 해
좁다란 내 소망들이
우주 속을 오간다.
우여곡절 읊조리면
산은 내 입술만 바라본다
고목들도 새 잎사귀로
바람과 밀애하는데
네 나이 몇 살이냐고
세월 타령 하냐고.
내 아무리 발버둥쳐도
허공의 연속인데
산은 그 허공 속에
가만히 서 있다
잡념의 경지를 벗는 날
나도 산방이 되리라.
♧ 숙취 - 김상욱
징그럽게 주독에 절여진
장한 육신이
장한 정신이
까만 숯 덩어리가 되어
연옥의 불 속으로 처박히는……
잘난 방종이 빚어낸
호된 담금질
어서 그 묘혈 속으로 들어가
참선하듯
지엄하신 어른을 모실까 하네
♧ 정낭 이야기 - 고정송
뒤진 세월도 세월이고 말고
그렇게 말을 하듯
멍들고 찌든 삶 훌훌 털고
빈 몸으로 서있다
세상사
뭐
별 것이더냐
뭉친 가슴 뻥 뚫어놓고
턱 하니
작대기 하나
뉘여 놓으면 되는 거지
나비란 놈
지나다 훨훨 춤추며 놀아주고
고추잠자리
톡톡 손등 치며 노닐면 되지
몸통 위엔 언제나
해와 달
별 돋는 하늘이 파랗더구나.
♧ 기억을 먹다 - 김성주
혼자 있어 출출한 날
히말라야 산정이 토해낸 조개껍질
사하라 갱도 속의 고래
희귀 재료로 탕을 끓인다
부글부글 우러나오는 바다
동태찌개
북엇국
명태, 너의 긴 여행의 노고를
고향집 아궁이에 쪼그려 앉아
먹는 것인데
짜다
바다의 기억들은 왜 짠가
♧ 안개 - 강문신
안개였다 파도소리 울림만 사무치고
섬도 배도 숨비소리도 없는 서귀포 바다
그 빈 손 꼭 쥐고 가던 한 치 앞도 안개였다
아득바득 헤쳐 온 그 반생이 안개였고
내일, 내일이라지만 내일 또한 그러할 터
어차피 농사차 행로 뭇 안개에 길들여진
저마다 가는 길을 여여餘餘히 가는 길을
“무슨 연유인가?” 한신들 쉴 수 없는 바다
그 여정 지친 날들의 그리움도 안개였다
♧ 꽃 - 나기철
젤라의 머리는
숲 귀퉁이 이팝나무꽃
오는 봄을 예비한다
♧ 나는 늘 바깥이다 - 정군칠
장마 지난 콩밭
어머니 무릎걸음으로 김맨다
구부린 관절 속으로 파고든,
밤이면 풀들이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 캐낼 수 없다 나는
늘 바깥이다
♧ 물수제비를 뜨다 - 양영길
가뭄으로 목마른 하늘을
적셔주던
오월의 고독을
물수제비 띄워본다
물 위를 건너뛰는 나의 분신
동그란 파문 잠깐 남겨두고
끝 모르게 잠수한다
그 사이 시간이 오가는 길목을
나는 막 뛰어가고 있었다
건너뛰고 뛰어
시간의 파문 속을 헤엄치면
파란 달개비 꽃이 피어 있는 들판을 지나
잠자리 떼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 노랑턱멧새 - 홍성운
치자
꽃물 먹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그해 가을
상행선에
몸을 싣던 그대여!
왜
오늘
숲 그늘에 와
먼 이름을 흘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