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귤림문학 20호와 매화

김창집 2012. 2. 24. 08:48

 

현고 동문 문학인의 모임인 귤림문학회에서

‘귤림문학’ 2011년 통권 제20호가 나왔다.

특집1은 ‘내 문학 속의 오현단’

특집2는 ‘귤림문학’ 20호를 맞이하여

그 외 스물세 분 시인의 시와

두 분의 소설 아홉 분의 수필이 실렸다.

 

그 중 시 몇 편을 골라

지난 월요일 한림공원에서 찍은 매화와 같이 올린다.

    

 

♧ 앞으로 10년은 - 문충성

 

내 친구 성종이가 말하기를

우리 나이쯤 되면 먹을 것에 고민하지 말라고

고희 넘겼으면 본전은 된 것이니

덤으로 사는 삶에 너무 욕심 주지 말라고

먹고 싶을 때 먹을 것 먹고

병들어도 앞으로 10년은 넉넉하게 살 것이니

즐겨 마시던 커피도 안 마시고

그 맛있는 도새기 고기, 쇠고기도 안 먹고

한잔 하면 돌고 도는

물레방아 백수가 꿈꾸는

백수(白壽) 은은히 밝아오는 술도 끊고

그러면 세상사는 맛 다 잃어버리니

힘 있을 때 잘 먹고 즐겁게 살라고

한다 앞으로 10년은 넉넉하게 살 것이니

병들어도 10년은

 

 

♧ 산방산 - 문태길

 

산에 오르면

나는 남이 된다

나 이전의 내가 되거나

나 이후의 내가 되기도 해

좁다란 내 소망들이

우주 속을 오간다.

 

우여곡절 읊조리면

산은 내 입술만 바라본다

고목들도 새 잎사귀로

바람과 밀애하는데

네 나이 몇 살이냐고

세월 타령 하냐고.

 

내 아무리 발버둥쳐도

허공의 연속인데

산은 그 허공 속에

가만히 서 있다

잡념의 경지를 벗는 날

나도 산방이 되리라.

 

 

♧ 숙취 - 김상욱

 

징그럽게 주독에 절여진

장한 육신이

장한 정신이

까만 숯 덩어리가 되어

연옥의 불 속으로 처박히는……

 

잘난 방종이 빚어낸

호된 담금질

어서 그 묘혈 속으로 들어가

참선하듯

지엄하신 어른을 모실까 하네

 

 

♧ 정낭 이야기 - 고정송

 

뒤진 세월도 세월이고 말고

그렇게 말을 하듯

멍들고 찌든 삶 훌훌 털고

빈 몸으로 서있다

 

세상사

별 것이더냐

 

뭉친 가슴 뻥 뚫어놓고

턱 하니

작대기 하나

뉘여 놓으면 되는 거지

 

나비란 놈

지나다 훨훨 춤추며 놀아주고

고추잠자리

톡톡 손등 치며 노닐면 되지

 

몸통 위엔 언제나

해와 달

별 돋는 하늘이 파랗더구나.  

  

 

♧ 기억을 먹다 - 김성주

 

혼자 있어 출출한 날

히말라야 산정이 토해낸 조개껍질

사하라 갱도 속의 고래

희귀 재료로 탕을 끓인다

부글부글 우러나오는 바다

동태찌개

북엇국

명태, 너의 긴 여행의 노고를

고향집 아궁이에 쪼그려 앉아

먹는 것인데

짜다

바다의 기억들은 왜 짠가

    

 

♧ 안개 - 강문신

 

안개였다 파도소리 울림만 사무치고

섬도 배도 숨비소리도 없는 서귀포 바다

그 빈 손 꼭 쥐고 가던 한 치 앞도 안개였다

 

아득바득 헤쳐 온 그 반생이 안개였고

내일, 내일이라지만 내일 또한 그러할 터

어차피 농사차 행로 뭇 안개에 길들여진

 

저마다 가는 길을 여여餘餘히 가는 길을

“무슨 연유인가?” 한신들 쉴 수 없는 바다

그 여정 지친 날들의 그리움도 안개였다

 

 

♧ 꽃 - 나기철

 

젤라의 머리는

숲 귀퉁이 이팝나무꽃

 

오는 봄을 예비한다

 

 

♧ 나는 늘 바깥이다 - 정군칠

 

장마 지난 콩밭

어머니 무릎걸음으로 김맨다

 

구부린 관절 속으로 파고든,

밤이면 풀들이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 캐낼 수 없다 나는

늘 바깥이다

 

 

♧ 물수제비를 뜨다 - 양영길

 

가뭄으로 목마른 하늘을

적셔주던

오월의 고독을

물수제비 띄워본다

 

물 위를 건너뛰는 나의 분신

동그란 파문 잠깐 남겨두고

끝 모르게 잠수한다

 

그 사이 시간이 오가는 길목을

나는 막 뛰어가고 있었다

건너뛰고 뛰어

시간의 파문 속을 헤엄치면

파란 달개비 꽃이 피어 있는 들판을 지나

잠자리 떼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 노랑턱멧새 - 홍성운

 

치자

꽃물 먹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그해 가을

상행선에

몸을 싣던 그대여!

 

오늘

숲 그늘에 와

먼 이름을 흘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