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나물로 오는 봄
봄이 되면 빈 밭이나 공터에
여러 가지 잡초가 꽃을 피운다.
그 중 색깔 때문에 얼른 눈에 띄는 것이
광대나물 꽃이다.
작지만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쩐지 우스꽝스런 광대 분장을 한 모습으로 보여
이름을 잘 붙였다는 느낌이다.
어떤 밭에는 아예
이 광대나물 꽃으로 한 가득이다.
험한 세상을 뒤뚱거리며 살아가는
어설픈 몸짓의 인간군처럼….
♧ 첫 봄나물 - 고재종
얼어붙었던 흙이 풀리는 이월 중순
양지바른 비탈언덕에 눈뜨는 생명 있다
아직도 메마른 잔디 사이로
하얀색 조그만 꽃을 피운 냉이와
다닥다닥 노란색 꽃을 피운 꽃다지와
자주색 동그란 꽃을 층층이 매단 광대나물
저 작은 봄나물들이 첫봄으로 푸르다
저 작은 것들이 지난 가을 싹을 틔워
몇 장의 작은 잎으로 땅에 찰싹 붙어
그 모진 삭풍의 겨울을 살아 넘기고
저렇듯 제일 먼저 봄볕을 끌어모은다
저렇듯 제일 먼저 봄처녀 설레게 한다
냉이 꽃다지 광대나물, 그 크기 워낙 작지만
세상의 하많은 것들이 제 큰 키를 꺾여도
작아서 큰 노여움으로 겨울을 딛고
이 땅의 첫봄을 가져오는 위대함의 뿌리들.
♧ 춤추는 광대 - 공석진
광대야
얼광대야
춤 한번 추어보자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휘청휘청 등신 몸짓
탈에 끈매인
네 운명이
갸륵하다
징 울려
사랑 애씌우면
춤사위가 어여쁠까
심장깊은 진자리
상흔 흐드러진
어름새를 얼러주면
얼씨구 얼쑤
걸판지게
추임새를 넣어주마
♧ 말하는 광대(廣大) - 황동규
말하는 광대가 밤새 말을 씹었다
말들이 끝나지 않으려고 서로 얽혔다
눈 몇 송이
바람에 뜨고
수레가 지날 때마다
길들이 끝나지 않으려고 서로 얽혔다
밤새 수레가 지나가고
수레가 갈 때마다
가슴이 패었다
가슴과 가슴이 끝나지 않으려고 서로 얽혔다
가슴의 흙이 짓이겨졌다
눈 몇 송이
바람에 뜨고.
♧ 어릿광대 - 美香 김은경
무대 위에 서면
얼굴의 짙은 분장
가슴 속 상흔은 감춘 채
온갖 재주, 춤을 추며
슬픈 웃음 보여주는 너
겉은 웃고 있지만
가슴에 각인된 생채기로
고독한 삶
어쩌면, 너의 모습은
아픔 하나쯤 묻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긴장된 외줄타기
휘청대는 삶처럼
♧ 광대에게 - 오세영
요란한 웃음소리,
이승은 온통 분꽃밭이다.
요란한 박수소리,
이승은 흐드러진 장미밭이다.
휘날레를 알리는 징이 울고,
불이 꺼지고,
빈 객석엔 꽃잎 떨어져 내리고,
밤이 왔다.
막이 내렸다.
탈을 벗는 광대여
어제 탈은 잡년 탈,
손다리, 전도녀, 제바달다* 탈
막이 내렸다.
찢어진 이마를 끌어안고
달밤에 홀로 우는 광대여,
돈으로 에미를 살 수가 어,
정으로 에비를 살 수가 없어,
소주 한 잔 마시고
비틀거리면,
요란한 웃음소리,
이승은 온통 분꽃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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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陀利, 전茶女, 提婆達多 : 전생의 인연으로 만나 釋尊을 번뇌에 빠뜨린 사람들.
♧ 광대 이야기 - 김순진
전깃줄 위 구르는 달을 꾸지람하며
정작 저는 고무줄놀이를 한다.
그렇게도 어긋장 난 삶을
꿰어 맞추는 퍼즐게임
그리도 까불대던
어느 광대의 겨울 문틈엔
별 하나 둘 뜨고
구경꾼 모두 집으로 간다.
세월이란 비수를 들이대며
세월의 강도가 자백한다.
“난 그저 웃기려 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막이 내린다.
♧ 당신은 이별과 만남의 줄에 줄타는 광대 - 손근호
뒤돌아보지 마세요
그댄, 뒤에는 이별과
앞에는 만남의 줄에
외로운 줄타기를 한답니다.
옆도 보지 마세요
가다보면 넘어지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는 사랑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앞만 보고 가세요
사람을 만나다 보면
밤새워 소리 없는 눈물
눈물 마를 인연도 만나게 되잖아요
그제사 줄에서 내려오세요
그대가 만난 사랑에
그 동안 외로이 염원하던
그대의 마음을 넣어세요
다시 시작 하세요
이제는 그대가 좋아하는 색깔과 톤
사넬21을 옷깃에 살짝 뿌리시고
그리고 그대의 마음을 칠하시면 됩니다
♧ 광대 - 강영환
판소리 열두 마당 안팎에 널린
물결들을 거두어들이며
바람은 열 두발 상모 그늘로 모인다
흙이 안 닿은 두 눈에 마저
천불을 켜고
휘청 휘청 쓰러지며 밟히는
그늘에 피를 쏟는다
인지와 중지를 깨물어 쓰는
허공에 불타서 사라지는 노을
맴을 돈다 맴을 돌다
전신으로 허물어져 혼자서
그늘로 친친 감기고 만다
쓰러진 잠들의 물결 위로
벗어 논 홋 적삼 하나 살아 남아
펄럭펄럭 마지막 나부끼며 돌밭을 간다
끝없이 갈아엎은 돌밭에
무성히 자라는 아우성
저희끼리 뼈마디 부딪히며
산도 물도 죽어 나동그라진 저녁 답에
관솔불을 켜고 우우우
마당가에 모여서 수없이 모여서
바람은
열 두발 상모 그늘로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