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4월호와 벚꽃

김창집 2012. 4. 5. 07:31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4월호가 거센 바람을 뚫고 왔다. 칼럼은 홍예영 시인의 ‘생의 명에는 방향이 있다’, 기획특집은 김금용 시인 중역시(中譯詩)로 김남조의 시인의 ‘추위’ 외 5편을, 특별 연재로 ‘이 詩, 나는 이렇게 읽었다’는 ‘느린 걸음으로(남유정)’와 ‘이따위 곳(장수철)’을 실었다.

 

  이달의 ‘우리詩’는 이무원 김두환 오형근 김영호 정숙 주경림 위상진 나병춘 노현숙 신미균 황원교 송시월 최정남 정재영 조영순 김선호 정문석 권순자 박찬두 장성호 조성례 한인철 곽도경 박종인 전홍규 최해돈 이환 임채우 최병숙의 신작시 각각 2편씩을, 신작 소시집은 신현락의 신작시 ‘금빛 물고기’ 외 4편을 권혁수의 해설 ‘빗방울 버스를 탄 금빛 물고기의 자유’와 김기리의 신작시 ‘가려운 봄’ 외 4편을 황정산의 해설 ‘오래된 새로운 시간’과 함께 나와 있다.

 

  영미시 산책(57)은 에냐 실버의 ‘퇴원(Leaving the Hospital)’을 백정국 겨수의 번역으로, 그리고 사고(社告)로 4월 29일(일요일) 오전 11시 도선사 앞 산록 우이도원(牛耳桃園) 시제터에서 ‘천지신명께 올리는 시제, 중식 후 시낭송과 음악과 춤’이라는 내용으로 ‘2012 삼각산 시화제’ 안내를 실었다. 마침 벚꽃이 피어있어 다가가 보니, 한 이틀 동안 부는 바람에 많이 상해있다. 임의로 시 8편을 골라 사진과 함께 싣는다.   

 

 

♧ 주인보다 더 - 오형근

 

  1

화분에서 자라는 야생화가 힘이 없어서 기운 내라고 산 흙을 가져다 주위에 얹어 놓았더니 그 속에서 싹이 솟아올랐다 흙에 묻어서 온 씨앗이 움튼 것인데, 주인보다 더 싱그럽다

 

  2

자기 몸에서

스스로 토해낸 실로

고치를 짓는 누에처럼

내 몸으로

나만의 집을 짓고 싶은 것인데,

내 몸은 벌써

앞선 사람들이 쓰고 버린

문자들의 쓰레기장    

 

 

♧ 파도에 대하여 - 나병춘

 

파도는 맨발이다

맨발이라 달빛도 햇살도 질끈 밟는다

바람도 무서운 듯 도망간다

먼 등댓불도 묵지근히 가물가물하다

맨발로 달려와 알몸으로 부서진다

아무 스스럼없이 애무한다

끊어질 듯한 안타까움으로 부서지고 깨진다

다르고 똑 같은 동작과 언어로

같고 똑 다른 춤사위로

부서지고 깨지고 까무러친다

 

시간에게 공간에게

오체투지 무릎 꿇는다

또 다시 항거한다

파도는 맨발이다

눈멀어 무서울 게 없다

귀먹어 떨리는 게 없다

맨발이라 영원토록 왕이다

천국과 지옥도 그 앞에 무너진다

아무 가진 게 없어 망설일 것 없다

 

파도는 온통 푸른 알몸,

바다를 안다 전혀 모른다

막무가내 달려들어 한통속으로 뒹군다

깨지고 바스러지고 허허허 웃는다

하얀 거품 안고 쓰러지다 다시 일어선다

맨발로 달려와 허무로 되돌아간다

되돌아가다 뭔가 안 잊히는 듯

미련처럼 또 다시 돌아온다

 

불러도 불러도 가버렸다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짠한 알몸으로 바보같이 서러움같이

그래서 파도는 허무한 사랑이다 이별이다

오래토록 잃어버린 오래된 절망

영원한 불완전 동사다

소금의 불꽃  

 

 

♧ 우울한 샹송 - 노현숙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목숨줄 다하는 주부, 주부 뒤에 다시 주부로 이어져온 나는 주부였다고 쓸 수 없다 지금도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꾐에 빠져 벼랑끝 마른 지팡이에 매달려서 오늘도 시를 쓴다.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활활 목숨의 관솔불 타오르는 것이 틀림없다 어느새 솥두껑 삶 속에 갇혀 숯이 되어버린 나, 나는 한순간 시라는 노래의 달콤한 유혹과 싸우며 새빨간 립스틱으로 우울한 샹송을 꿈꾼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서투른 고백이 나를 불러내어 먼지 낀 창유리를 흔들고 폐허의 목소리만이 먼 허공을 바라본다

 

  먼 길 끝에서 내가 나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 꽃샘추위 - 황원교

 

두꺼운 옷을 황급히 꺼내 입었지만

몸속 가시들이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바람에

한 그루의 엄나무처럼 선 채

 

건너다보면

뜻밖의 시련 앞에서도 목련나무의 우듬지 꽃눈들은

굳은 침묵으로 촛불을 환히 켜들고

개화라는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듯

 

광막한 밤하늘 속에서도

한 발짝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별들처럼

모든 것은 절정의 순간을 향해

오롯이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불현듯

이렇게 몸이 아픈 것도

꽃 피우는 것도

결국 견디는 일임을 깨닫게 하려고……

 

계절은 앞에서만 오지 않은 거라고

느닷없이 달려와

뺨을 후려치고 가는 칼바람  

 

 

♧ 세열단풍 - 조영순

 

갈래갈래 갈라진 둥근 집 한 채

 

단 하나도 겹치지 않게 뻗어나간 생각

그늘에 들지 못한다

 

이유를 묻지 않는 사소한 한때

하나, 둘

찰칵

휘파람불며 돌아서는

쓸데없는 짓

행복이란다

 

사월, 붉은 꽃을 피우는 암수 한 그루  

 

 

♧ 통증 - 고영민

 

  중국에는 편지를 천천히 전해주는 느림보 우체국이 있다지요 보내는

사람이 편지 도착 날짜를 정할 수 있다지요 한 달 혹은 일 년, 아니면

몇 십 년 뒤일 수도 있다지요 당신에게 편지 한 통 보냅니다 도착 날짜

는 그저 먼 훗날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길 원합니다 당신

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길 원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 번, 수백 번의 후회가 나에게 왔다 가고 어느 날

당신은 내가 쓴 편지 한 통을 받겠지요 겉봉을 뜯고 접은 편지지를 꺼

내 펼쳐 읽겠지요 그때 나는 지워진 어깨 너머 당신 뒤에 노을처럼 서

서 함께 편지를 읽겠습니다 편지가 걸어간 그 느린 걸음으로 내내 당

신에게 걸어가 당신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한 홉 한 홉 차올랐던 숨

을 몰아 내쉬며 손을 내려놓을 즈음 편지 대신 그 앞에 내가 서 있겠습

니다.

 

 

♧ 금빛 물고기 - 남현락

 

아이가 곁에 와서 종이를 놓고 간다

색종이로 곱게 접은 물고기 한 마리

바다 속을 헤엄쳐간다

금빛이다

 

아이가 들어간 빈 교실에

초록금빛 물결 출렁인다

듣기로는 심해의 어떤 물고기는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소리 통로가 있다고 한다

아이에게도 내가 모르는

바다로 통하는

황금열쇠가 있나보다

 

일상은 늘 남루하다 해도

그 아이의 바다처럼

금빛 물고기처럼

빈 교실에 출렁이는 물결처럼  

 

 

♧ 그 여자 - 김남조

 

햇볕 쪼이는 푸성귀의 기쁨이

제일로 부러운 여자.

문고리 덜컹대지 않아도

한밤의 바람 손님을 아는 여자.

마음에도 날개를 달아

고달파라 고달파라 날갯짓 쉬지 못하고

옛사람 옛 산수와도 길을 터

저들에게 찻상 내미는 여자.

나막신 짚신 갈아 신으며

궂은 날 개인 날에 길 걷는 여자.

잉태와 해산이 제일의 장기라

그러자니 어느 땐 광야에서

혼자 애 낳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