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한라수목원의 수수꽃다리

김창집 2012. 4. 19. 00:12

 

한라수목원 본토 수종이 심어 있는 곳에

라일락을 닮은 꽃이 피어 있다. 수수꽃다리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데, 향기 또한 라일락 같다.

 

수수꽃다리는 물푸레나뭇과에 속한 낙엽 관목으로

높이 2~3m 정도로 자라며, 잎은 난형으로 마주난다.

4~5월에 연한 자주색 꽃이 피며 9월에 열매가 익는다.

관상용이고 석회암 지대에 자라는데 우리나라의 평남,

함북, 황해도 등지에 분포한다.

 

넓은잎 정향나무라고도 하는데, 개화기 때에 서양 선교사가

우리나라 북한산에서 자생하는 ‘정향나무(털개회나무)’의

씨를 가져다 개량한 것이 ‘라일락’이며, 미군정시대에

미군장교가 씨를 가져다 만든 것이 ‘미스김라일락’이라 한다.  

 

 

♧ 수수꽃다리 - 김승기

 

북한산 깊은 골짜기

꼭꼭 숨은 정향나무

누가 너의 씨를 훔쳐갔느냐

벌 나비 부르려고 터뜨린

그놈의 향기 때문에

어느새 도둑맞았구나

 

도둑맞은 씨앗

라일락으로 튀기 되어 돌아와

미군부대 기지촌 방석술집의 마담 언니처럼

요염한 자태로 진하게 화장하고

흐드러진 웃음 헤프게 팔고 있구나

 

 

잃어버린 게 어디 너의 씨뿐이랴

패랭이꽃이 카네이션 되었고

닭의장풀은 양달개비 되었으며,

참다래도 키위 되어 되돌아오고

제비꽃은 팬지로 돌아왔으니,

도둑맞은 게 한둘이어야지

 

사람들아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칠 생각을 않으니

언제 또 무엇을 잃을지

마음 놓지 못하겠구나

 

이젠 버젓이 주인 행세까지 하며

무소불위로 온 누리를 활갯짓치는 라일락

그 위세 당당한 몸짓에

기죽은 수수꽃다리의 찡그린 얼굴

수줍은 웃음이 서글프다   

 

 

♧ 수수꽃다리 - 권도중

 

못 잊어 푸르른 청춘의 그늘에 피어

떠내려 보내야는데

흘러서 오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쟁취했어야 했다

 

살면서 잠겨두는 여인의 길을 내가 본다

먼 바람으로 와 그 속으로 가고 있다

내 꿈이 남의 삶이 된 사람

용서하라 용서하라

 

보낼 수 있어야 못 보낸 목숨도 있다고

수수꽃다리 핀다 차마 아름다운 그대

깊은 강 물고 다시 덮으며 늦은 오월이 진다  

 

 

♧ 수수꽃다리의 노래 - 김시천

 

불러다오

바람에 속삭이듯 그렇게 불러다오

풋가슴에 여울지던 향기로운 나의 모국어로

어루만지듯 그렇게 불러다오

마침내 다시 내 이름을 불러다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함께 어울려 흐드러지게 속삭이던 봄날의

그 향기

내게로 와서 사랑을 고백하던 순결한 여인들의

더운 입맞춤으로 그렇게 불러다오

그렇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 사랑하고 꿈꾸며 살아왔나니

때로는 아픔으로 잠 못 이루고

피 묻은 상처 아직 아물지 않았다 해도

나는 언제까지나 이 땅의 수줍은 연인이나니

내 이름을 불러다오

지금 가슴 삼삼한 오랜 날의 그리움으로

불러다오

향기로운 나의 모국어로 속삭이듯

어루만지듯 그렇게 불러다오

       

 

♧ 수수꽃다리 - 도광의

 

박완서의 장편 ‘미망(未忘)’에서

경기도 개풍 산기슭에 핀

수수꽃다리를 보았다

이름이 맘에 들어

시(詩)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몇 년 후

눈 밝은 잠자리

거미줄에 걸린

충북 속리산 중턱에서

수수꽃다리를 보았다

한동안 꽃 앞에 서서

“앙증맞은 네가 수수꽃다리로구나”하고

붉은 입 속으로 자꾸 되뇌어본다

       

 

♧ 수수꽃다리 - 주근옥

 

수수꽃다리

보고 있노라면 배가 고파요

 

향기에 그늘 겹쳐

혼자라도 귀가 시려요

 

아시죠 당신은 이 자리가

왜 서늘한가, 흔들거리는가를

 

수수꽃다리

잡고 있노라면 가슴 저려요   

 

 

♧ 어제는 비가 왔었다 - 이향아

 

어제는 비가 왔었다.

간직했던 사랑을 모두 털어서

비는 흙 속에 피처럼 스미더니

오늘 아침 눈을 뜨는 수수꽃다리

맑게 흔들리는 옆모습이 되었나.

꽃이여,

이제는 입을 열어 말하려는가

다 지난 일이라고.

걸어가는 음계의 옥타브마다

노역의 발바닥은 숨을 뽑아 올리고

저 하늘 자락을 깊게 물들이면서

소금가루 날리는 한낮 일광에

머리칼 억새처럼 흩날리게 둔다.

어제는 비가 왔었다.

그 비에 나도 봄흙처럼 젖어

오늘 아침 늦게 피는 수수꽃다리

한 사흘 날아가는 물무늬나 되련다.   

 

 

♧ 토지문학공원 1 - 고진하

 

해질녘 토지문학공원에 가서

돌담 가에 우뚝 선 수수꽃다리를 보았습니다.

가을을 마중하는 잎새들은

가장자리부터 안으로 발그레 물들고 있었습니다.

깊이 여물지 못하고

늙어만 간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은

수수꽃다리를 등지고

평사리 마당으로 발걸음을 뗄 때입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도

홍이동산을 적신 까치놀이 내려와 놀고 있었습니다.

모형 속에도 아름다움은 깃듭니다.

아무리 그래도

무슨 모형처럼은 되고 싶지 않지만

까치놀조차 마당에 붙잡아 둘 깜냥이 못됩니다.

깊이 여물어 가는 일이

한무릎 공부로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니겠지요

어둑어둑 공원을 덮는 저 어둠도

누군가에겐 소중하기 짝이 없는 꿈의 재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