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꽃에서 풍기는 향기
오월도 중순으로 흐르는 아침
붓꽃에서 풍기는 향기가 소담스럽다.
오늘부터 오름 길라잡이 양성 과정
첫 강의가 시작된다.
해설사 과정에 이어지는 강좌여서
벌써 여섯 번째 해를 맞이한 것이다.
오늘 새로운 식구들을 맞아
오름의 중요성과 자연의 소중함을 알리는
보람 있는 강좌로 자리매김 되기를 소망해본다.
♧ 붓꽃을 보면 - 김승기
조그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안다
여린 붓끝으로도
커다랗게 하늘을 열고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는지
메말라 가는 세상살이
그래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거라고
하늘 향해 토해내는 절규
바람이 불거나 눈 내리고 비가 와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일
아무리 짧은 생을 살아야 하는 몸일지라도
이제까지 달려온 길 되돌아보면서
잠시 한 번쯤 숨 고르며 멈추어 서야
앞으로 가야할 길 눈에 보이고
다시 지친 몸에 힘을 넣어줄 수 있는 거라고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텅 비어버린 속마저 무너져 내려
시커멓게 시들고 마는 몸일망정 아끼고 사랑하며
오늘도 여린 붓끝으로
왜 그렇게 하늘 가득히 그리고 있는지
조금만 마음을 열면 보인다
♧ 붓꽃 - 박인걸
초여름 햇살이
금빛으로 쏟아지는
푸른 잔디밭 한 편에
소복이 핀 붓꽃
꼿꼿한 선비가
남색을 초필에 묻혀
구름 갠 하늘에
보이지 않는 글을 쓴다.
눈부신 여름 꽃들
끝없는 초록빛 들판
청아한 새의 노래
조물주의 걸작품들
들레지 않는 손길로
조화롭게 가꾸는 오묘함
창조주의 축복을
차곡차곡 적고 있다.
♧ 붓꽃 - 김귀녀
초봄에 심은 붓꽃
샘터 미나리 밭가에 가지런히 피어 있다
아픔도 슬픔도 초월하고
말 못할 사연 가슴에만 품은 채
진보랏빛 바람으로 온다
상처를 사랑하는 봄 햇살아래
세상 고뇌 홀로 떠안고 서럽게 살아가는
쓸쓸한 내 가슴처럼
슬프게 피어
푸른 하늘만 쳐다본다
♧ 붓꽃의 연서 - 槿岩 유응교
그대가 그리워
그립고 그리운 사연
푸른 하늘에 써놓았건만
뭉게구름이 말없이
지우고 흘러갑니다.
그대가 그리워
보고 싶고 보고픈 사연
맑은 호수에 써놓았건만
나룻배가 조용히
지우고 지나갑니다.
그대가 그리워
함께 있고 싶은 마음
푸른 초원위에 써놓았건만
바람결이 무심코
지우고 떠나갑니다.
그대여 이 마음을
이제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으니
뭉게구름 피는 저녁나절
바람결에 나룻배를 타고
다정히 웃으며 내게로 오오.
♧ 붓꽃 - 최해춘
청보라 미소를
아스므레 머금어도
오 가는 이
눈길 한번 머물지 않는 자리.
뿌리는 돌을 뚫는
아픔도 초월하고
잎새에 이는 기개 대지를 다스리네.
고즈녘히 부는 바람
외로움을 실어 와도
청보라 미소는 초야에 퍼져 간다.
옛 선비 쓰던 붓대
붓꽃 되어 피어나서
선인의 절개 같은 고고함을 흩날리며
청보라 붓꽃 향기
하늘 향해 떠나가네.
♧ 바람 부는 저녁에는
나도 함석지붕처럼 흐르고 싶다 - 신지혜
무늬진,
저녁 뼈마디에 내 이름을 꽂는다. 무슨 무인도 깃발 같은 붉은 창문
을 달고 지나가는 바람을 간절히 부른다. 늦은 구름이 태연히 지나
간다. 목울음 삼키는 먼 산등성이 툭, 붉어져 나온 심장에도 투명한
유리창이 달려 있을까. 셀로판지 같은 허공에 뺨을 부비는 함석지붕
들이 흐르고 싶어 안달이었다. 길가, 거꾸로 선 나무들이 맨 뿌리로
서로를 더듬는 저녁, 이따금씩 빈 인스턴트 캔들이 골목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자꾸만 눕혀도 다시 일어선 길들이 녹슨 철문의 문고리
를 잡아 흔든다. 깜깜한 어둠이 공중에 낳은 새알 하나가 허공을 더
높이 밀어올리고 있었다. 주름진 어둠의 표피속에서 수련처럼 천 년
을 훌훌 벗어 버린 채 푸른 붓꽃이 다투며 피고 있었다. 잘 망치질
된 함석지붕처럼 나도 흐르고 싶었다. 바스락, 귀를 달싹거리며 무엇
인가, 두터운 어둠의 표피를 파열시키며 수수꽃다리 같은 꽃불을 밀
어올렸다. 가느다란 소리의 실핏줄이 죽죽 어둠에 칼금 그었다. 그러
자 검붉은 소리알들이 저 공중에 솟아올라 물총새처럼 오래도록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