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한련, 꽃으로 말하다

김창집 2012. 5. 27. 01:03

 

오름 길라잡이 수강생들과 두 번째 오름 가는 날

오늘의 주제는 ‘오름에 사는 동물’,

강의를 여는 오늘의 시로

박두진 시인의 ‘해’를 낭송하고

300여년 전에 만든 탐라순력도 ‘교래대렵’에

사냥하던 그림을 보여준다.

임오년 음력 10월11일 임금께 진상할 사냥을 하는데

삼읍 수령과 감목관의 참관하는 가운데

마군(馬軍) 200명, 보졸(步卒) 400여명,

포수(砲手) 120명이 참가하여

사슴 177마리, 산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꿩 22마리를 잡았다 하니

모두 놀랜다. 오름 등반을 마치고

자연사박물관으로 가

박제된 동물을 보여주며 강좌를 마쳤다.

 

 

한련(旱蓮)은 한련과에 속한 한해살이풀로

잎은 거의 둥글고 긴 잎자루 끝에 방패같이 달린다.

6월에 잎겨드랑이에서 한 개의 대가 나와서

그 끝에 적색, 주황색, 크림색, 황색의 빛깔을 띤

다섯 잎의 꽃이 피며, 과실은 둥글넓적하다.

특유의 냄새가 나는 잎과 매운맛이 나는 씨는

향미료로 쓰인다. 관상용으로 재배되기도 하며,

원산은 멕시코와 남아메리카이다.  

 

 

♧ 젖고 싶지 않다 - 최원정

 

수련 잎에 물방울이 또그르르 구르듯

한련화 잎에 이슬이 그렇게

동글동글 앉았다 사라지듯

마음 한 가운데

어떤, 근심도 젖지 않았음 싶다

 

결코, 외면해서가 아니라

그대로 온전하게 구르다가

바람결이나 햇살에 못이기는 척

그렇게 사라졌으면 싶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허공에 지은 거미줄이

이슬에 젖어 끊어진다거나

무너지는 일이 없는 것처럼

어떤 신념도 너그러우나 견고했으면

 

이 생 마칠 때까지   

 

 

♧ 턱 낮은 뒷문 하나 있으면 좋겠다 - 유승희

 

칠흑 같은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는 꺼멍 밤

동글동글 달빛 차르르 쏟아지면

그 옛날 꼬맹일 적

엄마가 가꾸신 예쁜 꽃동산

채송화, 백일홍, 맨드라미, 봉선화, 한련화

졸망졸망 고것들

납작 엎드려 소록소록 잠든 위로

달빛 차란차란 춤추는

평화로운 모습 볼 수 있으면 좋을

뒤란이 있는 턱 낮은 뒷문 하나 있으면 좋겠다

 

땡글땡글 볕 뜨거운 날

억새 발 하나 걸어놓고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

팔죽선 하나에

뒷동산 골짜기 바람 가슴팍 시원하니

긴긴 여름 너끈히 보낼 수 있는

턱 낮은 뒷문 하나 있으면 좋겠다

 

안개 비 부슬부슬 내리면

축축한 구들

메적지근 불 지피고

우거지 삶은 듯 떱떠름한 녹차 홀짝이며

뽀얀 안개 감실감실 산허리 감고 도는 멋들어진 정경에

그럴 듯한 시 한편 건져 올릴 수 있는

턱 낮은 뒷문 하나 있으면 좋겠다

 

뭐니뭐니 해두

나 늙어

당신이랑

턱 낮은 뒷문이 있는

그런 집에서 살았음 참 좋겠다.   

 

 

♧ 5월이 가기 전에 - 권오범

 

생때같은 미나리와 함께

초장에게 조물조물 당해

서로 끌어안고 정신 나간

우여회가 굴뚝같다

만약 바람의 순서를 바꾸라면

한평생 수군덕수군덕 따라다녀

어차피 이골이 난 메아리 앞 토막

밴댕이회도 괜찮고

그것마저 희박하다면

아, 나는 또 언제까지 어떻게

유년에 갈무리해둬 곰삭은

이 담백한 그리움들을 달래야 한단 말인가

하루가 다르게 생화 헤집는 난기류 때문에

얽힌 실타래처럼 배끗배끗

뜬구름 잡는 마지노선

아까시꽃이나 뭉터기로 씹고 있는데   

 

 

♧ 심상찮은 초여름 - 권오범

 

초목들 건강을 위하여

태양이 제가 낳은 그림자를

최대한 끌어당기자

아가씨들 옷이 덩달아 짧아졌다

 

그냥이 아니고 더러 경쟁적으로

야들야들한 속

적나라하게 들어내고 싶어

철딱서니 없게 안달한다는 것

 

허술한 매무새 피할 수 없어 훔쳐본 날부터

눈치 빠른 하늘 벌써 죗값 결정했는지

비틀지도 않고 은근히 몸 쥐어 짜

갈수록 더 호졸근해지는 마음

 

예년에 비해 터무니없이 서두르는 것이

아마 부여받은 기간 내내

가마솥 여물처럼

속속들이 삶아대려고 작정했나보다   

 

 

♧ 초여름 일기 - 이정원

 

   한낮은 뭉근하다. 푸른 잎사귀들이 더위에 제 몸을 내어 주고 달아오르는 동안 아이와 팔베개하고 드러누워 클클 대며 만화책을 읽었다. 사그락 사그락 마르는 빨래, 바람이 휘저으며 노는 소리, 쓰레기통은 한참 부화중일 테지. 살충제를 들고 일어나는 순간 아이의 잠이 툭 떨어진다. 어느새 아이는 어미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듬지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인가. 몸이 뿌리로 박혀 꽃으로 환생할 어디쯤 곤충의 애벌레같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아이의 잠을 베게에 올린다. 아이는 놓쳐버린 꿈을 움켜쥐려 한번을 더 뒤척이고, 땅속의 모든 벌레들이 돌아눕는 소리, 땅의 껍질을 깨고 튀어 오른다. 쓰레기통은 닫혀 있다. 마른 잎이 물을 끌어당길 동안 빨래집게에 꽂힌 햇빛 한줌 마악 잎사귀에 내려앉을 판이다. 주룩주룩 설거지물 하수구에 쏟아져 내린다. 아이의 덜 닫힌 잠의 창으로 한 줄기 소낙비 시원스레 퍼붓는다. 뭉근해진 한낮이 조리개 속으로 풀어진다. 풋여름이다.  

 

 

 초여름 밤의 비가 - 이복란

 

구리 자지러질 듯

밤꽃 향내음 물씬한 교성

하,

부끄러워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그리움

그리움 총총히 박힌

하늘 자락에 걸어놓은 시계가

깜빡 졸다 떨어진

침상에는

설운 초여름 밤이 드러눕는다.

눅룩한 어둠을 가로질러

밤꽃 꺾어 내게올

그 길에

촛불 하나 켜 놓았었는데

뽀얀 안개 쓱 문지르고

성큼 들어서는 아침,

햇살이

참 눈부셔라.   

 

 

♧ 치유의 숲 - 강효수

 

마음이 바쁜 날에는

숲으로 가자

고요한 숲의 정맥

숲길을 걷다 보면

바쁜 심장은 무심으로 흐르고

바쁜 몸짓 바쁜 숨결

살포시 안아주리라

 

한 때

시린 가슴마저 하늘에 내어주었던

숲은

이해와 용서로 화해하며

상처를 보듬어 푸른 가슴 이루었다

세상이 안아줘야 행복한가

숲은 세상에서 버려져야 행복한데

 

삶이 헝클어지고

생각이 바쁜 날에는

숲으로 가자

숲의 정맥 따라 심장으로 들어가면

내 안에 나는 무념으로 흐르고

바쁜 눈길 바쁜 걸음

지그시 재워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