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춘의 ‘어떤 직유’
* 변산바람꽃
장영춘의 두 번째 시조집 ‘어떤 직유’를 보내왔다.
그 중 꽃에 대한 시만 골라 사진과 함께 싣는다.
장영춘은
제주 곽지 출생으로
2001년 ‘시조세계’ 신인상
시집 ‘쇠똥구리의 무단횡단’
한국작가회의, 제주작가회의 회원이다.
□ 시인의 말
어딘가 마음 붙일 곳 없는 날엔 길을 나선다
무작정 길을 걷다 우연히 눈 마주친
영하권 숲속에 꽃을 피운
변산바람꽃, 새끼노루귀에 첫눈을 맞췄다
미세한 떨림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채워주는
그들의 언어 그 인내를 닮고 싶다
아직도 뿌리 내리지 못한 내 시가 꽃 앞에서 부끄럽다
2012년 3월 어느 봄날
장영춘
♧ 민들레
아버지 그 아버지의
물려받은 이 땅 위에
무비자 출입증 가방 든 노란 염색머리
민들레 씨방 날리며 길이 하나 생겼다
내 키를 높일까 말까
저 길을 달릴까 말까
사방으로 뻗은 길에 사방으로 눈을 뜨는
키 낮은 조선 민들레 뒤꿈치가 하얗다
♧ 제비꽃
소년원 울타리 안에 축축한 손 내미는 아이
강남간 제비도 오기 전에
제비꽃은 피어서
파리한 외투 걸치고
아직 거기 섰구나
초롱초롱 밝은 눈빛조차 다 풀리고
까까머리 정수리에
햇살 잠시 내리면
정이월 보도블록에
물음표를 세운다
♧ 섬, 양지꽃
중산간 마른 들녘
스멀스멀 다가오는
눈 한 번 감지 못한
등 한 번 붙이지 못한
엄한 설 쫓겨난 아이
이제 겨우 눈을 뜬다
개나리 유채꽃에
하늘까지 노랗게 누운
사월 능선을
오르내리는 시선 밖에
낯익은 양지꽃들이
배고픈 손 내민다.
♧ 붓꽃
빗금 하나
그어 놓은
하늘 길 그 길 따라
멍하니 오월 뜨락에
붓 들고 서 있는
그대
지명의 남루를 벗어라
내 등뒤로
다가선
♧ 치자꽃
웃는 듯 손사래 치며
안개 숲에
묻혀버린
살아 살아 청맹과니,
살아 살아 청맹과니
고모님 하얀 틀니가
빗속에도 보인다
♧ 나팔꽃
붉다가
희다가
저 혼자의 몸짓으로
어느 날
소식도 없이
빗속으로 다가와
링겔병
하늘에 건 채
내 창 앞에 서 있다
♧ 그 하얀 목련
장롱 한 귀퉁이
이십년 전 털실 뭉치
발갛게 언 손 녹이며
웃고 있던 내 아이가
세월을 비켜 달려와
와락 내게 안긴다
뽀송뽀송 아이 얼굴
열두어 살 솜털이 돋아
골목길 휘돌아와 발 동동
구르던 겨울
대문 밖 하얀 목덜미
그 하얀 목련 송이
♧ 순비기
코 끝에 대기만 해도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온종일 바위 끝에
백치처럼 앉은 순이
어머니 테왁 망사리만
부표처럼
떠
도
는
♧ 월령리 선인장
월령리 골목길엔 선인장이 울타리다
돌빌레 모래사장 척박한 땅을 지나
사월의 징검다리 건너
휘청휘청 오시는
덩그마니 정낭 하나 문패처럼 놓여있는
줄지어 드나들던 바람마저 떠난 자리
영정 속 무명천 할머니
손사래를 치신다
참담한 그 가시밭길 홀로 걸으신
선인장 잔가시가 그날처럼 박혀와
깡마른 사삼의 역사
잿빛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