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장영춘의 ‘어떤 직유’

김창집 2012. 5. 30. 08:40

* 변산바람꽃 

 

장영춘의 두 번째 시조집 ‘어떤 직유’를 보내왔다.

그 중 꽃에 대한 시만 골라 사진과 함께 싣는다.

 

장영춘은

제주 곽지 출생으로

2001년 ‘시조세계’ 신인상

시집 ‘쇠똥구리의 무단횡단’

한국작가회의, 제주작가회의 회원이다.     

 

 

□ 시인의 말

 

어딘가 마음 붙일 곳 없는 날엔 길을 나선다

무작정 길을 걷다 우연히 눈 마주친

영하권 숲속에 꽃을 피운

변산바람꽃, 새끼노루귀에 첫눈을 맞췄다

미세한 떨림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채워주는

그들의 언어 그 인내를 닮고 싶다

아직도 뿌리 내리지 못한 내 시가 꽃 앞에서 부끄럽다

 

2012년 3월 어느 봄날

장영춘  

 

 

♧ 민들레

 

아버지 그 아버지의

물려받은 이 땅 위에

 

무비자 출입증 가방 든 노란 염색머리

민들레 씨방 날리며 길이 하나 생겼다

 

내 키를 높일까 말까

저 길을 달릴까 말까

 

사방으로 뻗은 길에 사방으로 눈을 뜨는

키 낮은 조선 민들레 뒤꿈치가 하얗다  

 

 

♧ 제비꽃

 

소년원 울타리 안에 축축한 손 내미는 아이

 

강남간 제비도 오기 전에

제비꽃은 피어서

 

파리한 외투 걸치고

아직 거기 섰구나

 

초롱초롱 밝은 눈빛조차 다 풀리고

 

까까머리 정수리에

햇살 잠시 내리면

 

정이월 보도블록에

물음표를 세운다  

 

 

♧ 섬, 양지꽃

 

중산간 마른 들녘

스멀스멀 다가오는

 

눈 한 번 감지 못한

등 한 번 붙이지 못한

 

엄한 설 쫓겨난 아이

이제 겨우 눈을 뜬다

 

개나리 유채꽃에

하늘까지 노랗게 누운

 

사월 능선을

오르내리는 시선 밖에

 

낯익은 양지꽃들이

배고픈 손 내민다.   

 

 

♧ 붓꽃

 

빗금 하나

그어 놓은

하늘 길 그 길 따라

 

멍하니 오월 뜨락에

붓 들고 서 있는

그대

       

지명의 남루를 벗어라

내 등뒤로

다가선  

 

 

♧ 치자꽃

 

웃는 듯 손사래 치며

안개 숲에

묻혀버린

 

살아 살아 청맹과니,

살아 살아 청맹과니

 

고모님 하얀 틀니가

빗속에도 보인다  

 

 

♧ 나팔꽃

 

붉다가

희다가

저 혼자의 몸짓으로

 

어느 날

소식도 없이

빗속으로 다가와

 

링겔병

하늘에 건 채

내 창 앞에 서 있다  

    

 

♧ 그 하얀 목련

 

장롱 한 귀퉁이

이십년 전 털실 뭉치

 

발갛게 언 손 녹이며

웃고 있던 내 아이가

 

세월을 비켜 달려와

와락 내게 안긴다

 

뽀송뽀송 아이 얼굴

열두어 살 솜털이 돋아

 

골목길 휘돌아와 발 동동

구르던 겨울

 

대문 밖 하얀 목덜미

그 하얀 목련 송이  

 

 

♧ 순비기

 

코 끝에 대기만 해도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온종일 바위 끝에

백치처럼 앉은 순이

 

어머니 테왁 망사리만

부표처럼

  

 

 

♧ 월령리 선인장

 

월령리 골목길엔 선인장이 울타리다

돌빌레 모래사장 척박한 땅을 지나

사월의 징검다리 건너

휘청휘청 오시는

 

덩그마니 정낭 하나 문패처럼 놓여있는

줄지어 드나들던 바람마저 떠난 자리

영정 속 무명천 할머니

손사래를 치신다

 

참담한 그 가시밭길 홀로 걸으신

선인장 잔가시가 그날처럼 박혀와

깡마른 사삼의 역사

잿빛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