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판나물아재비와 정드리
정드리문학회에서 낸 동인지 제3집
‘붉은발말똥개’에서 지난번 올렸던 다음 순서로
한 분 당 하나씩 시를 뽑아 윤판나물아재비와 같이 올린다.
윤판나물아재비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50cm까지 자란다. 근경은 짧고 포복지를 내는데,
잎은 긴 타원형 또는 넓은 타원형이다. 꽃은 4~6월에 피고
줄기 끝에 1~3송이가 달리며 밑으로 쳐진다.
윤판나물의 꽃은 노란색인데 비해
이 윤판나물아재비 꽃은 녹색을 띤 흰색 꽃이 핀다.
지난 5월 한라수목원에서 찍었다.
♧ 알게 하소서 - 신은재
늘
도란도란
흘러가는 물처럼
하루의 순간순간
낮은 골짜기를 지나
더 이상 갈 수 없는
수평선도 좌악 찢고
가자, 가자, 가자
하루가 마감될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 같이 여겼던
그 마음 알게 하소서
♧ 사려니 - 안창흡
곤파스, 말로*
밀쳐낸
사려니
숲
파릇한
햇살 한 올
잎사귀
간질이면
꺄르르,
울음 문 웃음
손 흔들며
새살 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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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파스, 말로 : 2010년 제7호, 제9호 태풍 이름.
♧ 시월 - 오승철
그냥
넙죽넙죽
받기만 하느냐고?
천만에,
나도 가끔은 ‘이쁘네’ 말공양 했다
잘 여문
모감주 열매
받아든
이 가을날
♧ 멀거니 - 윤행순
아침에는 햇살 몇 점 저녁에는 함박눈
버스도 택시도 다 보내놓고 혼자다
제주시 버스터미널 앉아 있는 할머니
바리바리 저 보따리 아들 집 가는 걸까
창 자국 확인해야 부활을 안 도마처럼
슬며시 차를 돌려서 그 앞에 세워본다
남편 따라 무수히 마을마을 떠돌던
오늘은 서귀포시 솔동산 어디쯤에
어머니, 속울음 참고 불러보고 싶다
♧ 증거 - 이경숙
부엌 한켠
아슬아슬
지켜낸 화분들은
겨우내 가족 몰래 입술 몇 번 훔쳤는지
이듬해 장마가 들자
뾰족뾰족 고백한다
♧ 자귀나무 - 이윤희
가지를 접어 다오
환장할 이 장마에
들녘에도 지붕에도
무수한 무지개가
다시는 못오는 자리
흥건히 적셔댄다
♧ 서귀포 - 이창선
한 세월 품앗이로
깻단을 털다보면
어느새 내 얼굴에도
죽은깨가 박혀 있다
어쩌면
그리운 이름
촘촘히 박혀 있다
범섬과 새섬 사이
문섬과 섶섬 사이
벌초 끝낸 산소처럼
마른 풀냄새 흐른다
서귀포
바닷길 붓 들고
늘어선 고추잠자리
♧ 곤을동 - 임태진
제주도 지도상에
사라진 마을이 있다
별도봉 기슭 아래 쑥부쟁이 터 잡은 땅
역사는 왜 ‘잃어버린 마을’이라 하는가
한 마을이 토째로
누명 썼던 1박2일
60여년 지났어도 불에 탄 집터는 남아
그 흙에 손바닥 대면 불씨 하마 살아날까
용서란 말 화해란 말
그리 쉽게 하지 마라
스물네 개 놋숟가락 그 뒤에 또 연좌제
울음도 마른 바다가 제사상에 뒤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