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박새 꽃과 ‘눈사람의 시’외

김창집 2012. 6. 10. 00:53

 

모처럼 한대오름엘 올랐다.

6월 그 짙푸른 녹음 숲길을 걸어

이 박새꽃 하얀 혼을 붙들면서

이제 여름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번에도 지난번에 이어

정드리문학회 동인지에 나온 시

문성해의 ‘눈사람의 시’외 6편을

박새 꽃과 같이 내보낸다.  

 

 

♧ 눈사람의 시 - 문성해

 

눈사람이 홀로 밤을 맞고 있다

저런 눈사람으로 골목에 나앉아 있어 본 적 있는가

 

세상의 집이란 집은

모두 제 가족을 끌어안고

도무지 모르는 빛으로 동그랗게 불 밝히고

내겐 더 이상 젖은 몸을 누일 집이 없고

더운 숨을 섞을 가족이 없고

이 골목과

이 밤과

이 둥그스름한 슬픔만 남아

 

골똘히 들여다 본적 있는가

봐도봐도 희디흰 몸속 같은 세상

흰 생쥐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몸속에서 기어 나와

나머지 몸들에게 말을 거는

 

이 순간을

이 슬픔을

미천이라고 해야 하나

고결이라고 해야 하나

 

눈발 하나하나가

더운 살로 덮이는

이 순간을

성숙이라고 해야 하나

장엄이라고 해야 하나

       

 

♧ 산울림 - 문인수

 

날씨가 아주 쾌청한 날엔 가끔 서울의 남산 꼭대기에서 북녘 땅 개성, 거기 송악산 윤곽이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쩌렁쩌렁! 그 거리는 얼마인가.

 

마라톤 풀코스 42.195km처럼, 아니, 단위 ‘1그리움’이나 ‘1기다림’이라 정해

어떤 안타깝고도 아득한 세월의 척도로 삼으면 안 될까.

 

아무튼, 언제 적 하늘이 돌아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날엔 참으로 우렁찬 통성명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 꼭지 - 박기섭

   --세 개의 연상

 

1.

가을볕의 젖꼭지도 다 빨기 나름이라 붉은 건 붉은 판에 누런 건 또 누렇거든

여태껏 초록의 빨대를 질겅거리는 것도 있고

 

2.

꼭지를 놓지 못한 채 쭈그러든 감을 본다

하반(下半)의, 젖 다 빨린 하반의 젖무덤 같다

단물이 빠져나간 자리 저리 선연한 잇자국

 

3.

아는가, 뉘 눈썹에 말라붙은 그 사랑을

성긴 가지 끝에 두어서넛 까치밥 같은, 언 채로 꼭지를 못 버린 그 가혹한 사랑을

       

 

♧ 가을 마루에 앉아 하루를 관음하네 - 박남준

 

뭉게구름이 세상의 기억들을 그렸다 뭉갠다

아직껏 짝을 찾지 못한 것이냐

애매미의 구애는 한낮을 넘기고도 그칠 줄 모르네

긴꼬리제비나비 노랑 상사화 꽃술을 더듬는다

휘청~ 나비도 저렇게 무게가 있구나

잠자리들 전깃줄에 나란하다

이제 저 일사불란도 불편하지 않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꽃 덤불 속에 몰려오고

봉숭아꽃잎 후루루 울긋불긋 져 내린다

하루해가 뉘엿거린다

깜박깜박 별빛만이 아니다

어딘가 아주 멀리 두고 온 정신머리가 있을 것인데

그래 바람이 왔구나 처마 끝 풍경 소리

이쯤 되면 나는 관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는데

귀 뚫어라 귀뚜라미 뜰 앞에 개울물 소리

가만있자 마음은 어디까지 흘러갔나

     

 

♧ 이명(耳鳴) - 박지현

 

1.

꽃이 지자 귀가 울었다 빛들이 스러지고 새들이 앉은 나뭇가지가 휘어졌다 오래된 풍경의 그늘 적막한 채 허물어졌다

 

2.

세상의 날 선 것들은 소리마다 파랬다 부딪치면서 제 속을 감출 줄도 알았다 불면의 휘청한 몸들 대낮에도 푸르렀다  

 

 

♧ 검은 꼬리 뿔 말* - 서안나

 

뿔은,

살을 찢고 달려 나온 첫 번째 분노

 

표범이 누우 떼를 뒤쫓고 있다

허기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누우 떼

새끼 누우가 목덜미를 물리는 순간

초원은 한 덩어리 살점으로 쓰러진다

 

새끼 누우의 뿔은

분노를 핏물로 바꿔

땅의 심장 속으로 흘러든다

이것은 건기의 분노 처리방식

 

풀은,

땅의 눈동자를 찢고 나온 두 번째의 분노

 

우기의 들판에 칼날처럼 돋아나는

풀이 움켜쥐었던 새파란 뿔의 기억

 

풀이 짐승 떼를 뒤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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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꼬리 뿔 말 - ‘누우’의 또 다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