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새 꽃과 ‘눈사람의 시’외
모처럼 한대오름엘 올랐다.
6월 그 짙푸른 녹음 숲길을 걸어
이 박새꽃 하얀 혼을 붙들면서
이제 여름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번에도 지난번에 이어
정드리문학회 동인지에 나온 시
문성해의 ‘눈사람의 시’외 6편을
박새 꽃과 같이 내보낸다.
♧ 눈사람의 시 - 문성해
눈사람이 홀로 밤을 맞고 있다
저런 눈사람으로 골목에 나앉아 있어 본 적 있는가
세상의 집이란 집은
모두 제 가족을 끌어안고
도무지 모르는 빛으로 동그랗게 불 밝히고
내겐 더 이상 젖은 몸을 누일 집이 없고
더운 숨을 섞을 가족이 없고
이 골목과
이 밤과
이 둥그스름한 슬픔만 남아
골똘히 들여다 본적 있는가
봐도봐도 희디흰 몸속 같은 세상
흰 생쥐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몸속에서 기어 나와
나머지 몸들에게 말을 거는
이 순간을
이 슬픔을
미천이라고 해야 하나
고결이라고 해야 하나
눈발 하나하나가
더운 살로 덮이는
이 순간을
성숙이라고 해야 하나
장엄이라고 해야 하나
♧ 산울림 - 문인수
날씨가 아주 쾌청한 날엔 가끔 서울의 남산 꼭대기에서 북녘 땅 개성, 거기 송악산 윤곽이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쩌렁쩌렁! 그 거리는 얼마인가.
마라톤 풀코스 42.195km처럼, 아니, 단위 ‘1그리움’이나 ‘1기다림’이라 정해
어떤 안타깝고도 아득한 세월의 척도로 삼으면 안 될까.
아무튼, 언제 적 하늘이 돌아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날엔 참으로 우렁찬 통성명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 꼭지 - 박기섭
--세 개의 연상
1.
가을볕의 젖꼭지도 다 빨기 나름이라 붉은 건 붉은 판에 누런 건 또 누렇거든
여태껏 초록의 빨대를 질겅거리는 것도 있고
2.
꼭지를 놓지 못한 채 쭈그러든 감을 본다
하반(下半)의, 젖 다 빨린 하반의 젖무덤 같다
단물이 빠져나간 자리 저리 선연한 잇자국
3.
아는가, 뉘 눈썹에 말라붙은 그 사랑을
성긴 가지 끝에 두어서넛 까치밥 같은, 언 채로 꼭지를 못 버린 그 가혹한 사랑을
♧ 가을 마루에 앉아 하루를 관음하네 - 박남준
뭉게구름이 세상의 기억들을 그렸다 뭉갠다
아직껏 짝을 찾지 못한 것이냐
애매미의 구애는 한낮을 넘기고도 그칠 줄 모르네
긴꼬리제비나비 노랑 상사화 꽃술을 더듬는다
휘청~ 나비도 저렇게 무게가 있구나
잠자리들 전깃줄에 나란하다
이제 저 일사불란도 불편하지 않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꽃 덤불 속에 몰려오고
봉숭아꽃잎 후루루 울긋불긋 져 내린다
하루해가 뉘엿거린다
깜박깜박 별빛만이 아니다
어딘가 아주 멀리 두고 온 정신머리가 있을 것인데
그래 바람이 왔구나 처마 끝 풍경 소리
이쯤 되면 나는 관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는데
귀 뚫어라 귀뚜라미 뜰 앞에 개울물 소리
가만있자 마음은 어디까지 흘러갔나
♧ 이명(耳鳴) - 박지현
1.
꽃이 지자 귀가 울었다 빛들이 스러지고 새들이 앉은 나뭇가지가 휘어졌다 오래된 풍경의 그늘 적막한 채 허물어졌다
2.
세상의 날 선 것들은 소리마다 파랬다 부딪치면서 제 속을 감출 줄도 알았다 불면의 휘청한 몸들 대낮에도 푸르렀다
♧ 검은 꼬리 뿔 말* - 서안나
뿔은,
살을 찢고 달려 나온 첫 번째 분노
표범이 누우 떼를 뒤쫓고 있다
허기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누우 떼
새끼 누우가 목덜미를 물리는 순간
초원은 한 덩어리 살점으로 쓰러진다
새끼 누우의 뿔은
분노를 핏물로 바꿔
땅의 심장 속으로 흘러든다
이것은 건기의 분노 처리방식
풀은,
땅의 눈동자를 찢고 나온 두 번째의 분노
우기의 들판에 칼날처럼 돋아나는
풀이 움켜쥐었던 새파란 뿔의 기억
풀이 짐승 떼를 뒤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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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꼬리 뿔 말 - ‘누우’의 또 다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