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백합이 피는 동네

김창집 2012. 6. 12. 00:12

 

여러 가지 백합 구근이 수입 재배된 뒤로

재래종 흰백합도 차츰 순수함을 잃어간다.

처음 주로 여름이 아닌 계절에

온실에 심어 출하할 때까지는 그래도

교배종이 되지는 않았었다.

 

러나 그것이 가끔 화단으로 옮겨지면서

흰백합 여기저기에서 순수하지 못한 피가 흐른다.

그래서 비양도나 우도에 갔을 때

순수한 꽃을 찍어오곤 했는데,

괜스레 바쁜 이번 여름은 신경 안써도 될 것 같다.

오늘 우리 동네에서 이걸 찍었기 때문이다.   

 

 

♧ 백합 - 정윤목

 

먼 세월 훗날에도 그리워할 흰빛 순수의 꽃이여

여름빛 걸쳐입고 도도히 자태 드높이는 고결한 꽃이여

하나의 지조 단아함 드리우고 키 높이 자라

무시로 연주하는 꽃열음

마음 기울일 때

익숙한 여심 그대 더불어 먼 곳 응시하네

 

그윽한

향 깊고 진하게

정면으로

도도히 세상 마주 본

하이얀 감격

트럼펫 음파

그대와 나

존재의 값, 유독 세우며

잔잔히 떨고 있네

꽃 앞에서,   

 

 

♧ 백합 향기 - 권달웅

 

  버스가 화원 앞 정류장을 지날 때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백합 한 다발을 안고 올라왔다.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본다. 새하얗게 언 차창으로는 앙상한 플라타너스가 지나가고 버스에 탄 몇은 쿨룩거린다. 갑자기 버스 안은 백합 향기가 난다. 작업복을 걸친 젊은이가 일어나 노인을 부축한다. 콩나물 봉지를 든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 아주머니를 보고 책가방을 든 학생이 웃는다. 나는 그 학생을 보고 웃는다. 변두리로 가는 버스에는 앙상한 플라타너스가 흔들리고 고단한 몇은 웃는다. 누구에게 주려는 백합일까. 밖은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부는데 버스 안은 온통 백합 향기로 가득하다.

 

 

 

♧ 어느 날 백합꽃을 만나다 - 架痕 김철현

 

계절의 정점에서 한 송이의 꽃을 만났다.

아담한 백합 한 송이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나를 흠뻑 취하여 혼미하게 했다.

언제나 나를 반기는 싱그러움은 나로 하여금

꽃은 절대로 시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그 어느

진리처럼 숭배케 하며 몇 해를 행복케 했다.

 

어느 날 꽃은 내 눈앞에서 힘없이 시들더니

구겨진 종이쪽처럼 형편없이 허물어지고

내 마음속의 꽃도 일그러진 흉물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백합꽃이란 향기도 없으며

아름답지도 않을 뿐더러 만날만한 가치도

만나고 싶지도 않은 존재다. 더 이상…….  

 

 

♧ 백합에게 - 이준호

 

아침을 쓸어내리며 흐르는 순백의 살결,

이슬 빛에 촉촉이 젖어 내린

그대의 청아함이 나는 좋습니다.

입술을 살포시 깨어 물듯

바다처럼 다물어진 입가에 흐르는

잔잔한 미소가 나는 좋습니다.

 

숨가쁜 메마름의 언덕 위를

바람처럼 비집고 들어와선

햇살 몇 조각 잔잔히 뿌려 놓고

날마다 고개를 들이밀어

내게 눈부심으로 몰아쳐오는

그대가 나는 좋습니다.

    

지루한 세상의 몸짓과

밤하늘의 적막함,

그리고 가녀린 세상의 하늘에

한 떨기 자그마한 소망으로 피어

가슴이 시릴수록 손끝이 따스한

그대가 나는 좋습니다.

 

텅 빈 거리를 서성이다

힘없이 돌아오는 저녁이

마냥 고독함으로 남을 때

저만치 하얀 속삭임으로 다가와

발걸음 가볍게 나를 불러

온통 그리움 되어 쏟아지는

그대가 나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