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은 피었는데
길가 화단에 치자를 많이 심어 놓았는데
가뭄에 물을 주지 않아
꽃이 수명이 짧아짐은 물론
말라 있는 모습이 영 안쓰럽다.
비가 와야 하는데
비는 안 오고
속절없이 죽어가는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구가 고장이 나지 않았나 의심이 된다.
꽃이 너무 마른 게 많아 생기 없이 보여서
비에 젖어 있는 작년 사진 두어 장을 덧붙였다.
♧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치자꽃 설화에 부쳐 - 김영숙
사랑이 서럽기야 했겠습니까
다 영글지 못한 인연으로 만나져
내도록 눈썹 밑에 달라붙은 채
눈을 감으나 뜨나 발그림 그리고 섰는
미련이 그리움인 까닭입니다
내 전생에 어찌 살아
만나는 인연마다 골이 패이고
설익은 목탁소리에 속 울음을 묻는 것인지
아무런 답을 들려 보낼 수 없었던
업장이 서러웠던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번민은 아닙니다
안고 싶은 그 사랑을 밀어내며
힘 풀리어 매달리던 무거운 두 팔
승속을 흐르는 일주문 달빛에 젖어
좀체 떨어지지 않던 한 쪽 다리입니다
정작 서러운 것은, 법당을 서성이다
열린 법당문을 빠져나가던 경종소리 쫓아
인연하나 변변히 맺지도 못하면서
변변하지도 못한 인연하나 못 놓아
산문을 되돌리던 복 없는 영혼이었습니다
♧ 치자꽃 향기 - 권도중
누구의 관심도
누구의 느낌도
누구의 위로도
누구의 조언도
누구의 간섭도
누구의 사랑도
누구의 전화도 필요 없는
몸짓만으로 아픔만으로 그리움만으로 치유만으로 그림자만으로
삶을 참아 작은 꿈 살릴 수 있다고 별 같은 자존 하얀 꽃이라고 열매는 굵은 짙은 향이라고 계곡 가득할 오래 꾼 꿈이었지 하얗게 펴 희망처럼 푸른 그림자 곁에서
슬픔아 마음아
너의 순수도 필요치 않다
존재만이 그리움 일 뿐
내 안에 집을 짖지 말아라
그냥 먼 닿지 않는 사랑으로 편한 사람으로
향기는 그래서 짙고 멀다
♧ 치자화 - 곽정숙
마음까지 젖을까
비오는 길이여서 나서지 못하고 서서
경박함이 보일까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그냥 서서
그대 발치에
소리없이 내려앉아
청량한 기운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까닭을 묻노니
그래서 아픔을 지우고 싶었을까
마음까지 젖을까
비오는 길이여서 나서지 못하고 서서
♧ 치자꽃 - 반기룡
흰 옷을 좋아했던 어머니가 그리워져요
하얀웃음 잔잔히 흐르던 나의 유년이
방안 가득 향기로 다가오는듯 해요
그립고 향기로운 것은
망각의 추억을 불러
생각의 언저리를 맴돌게 하지요
뜨락에 피어있는 치자꽃
마치 하얀나비 나풀거리듯
방안 가득 선회를 하네요
부유하는 너의 향은
콧잔등 휘감은 채
사뿐사뿐 어디로 발걸음 옮기려 하나요
차자꽃 향을 맡고 있으니
오늘따라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네요
♧ 치자 꽃물 빛 - 나태주
오늘도 오늘의 해가 지고 있다, 치자 꽃물 빛
해장국밥집 아낙들은 큰 목소리로
웃으며 떠들며 해장국밥을 말고
창 밖으로 줄지어 선 전화부스
전화 거는 사람들이 보인다
휴가 나왔다 귀대하는 초록색 모자
시골에서 올라왔음직한 커다란 보따리
담배를 꼬나 문 헙수룩한 잠바 차림
나는 방금 고급 호텔에서 열린
결혼식 피로연에서 빠져 나와
해장국밥집 창가에 앉아
한 그릇의 해장국밥을 시켜놓고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다
오늘도 오늘의 하느님은 평안하시다, 치자 꽃물 빛.
♧ 梔子치자꽃 - 유치환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 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